윤석열 당시 대통령이 지난해 8월30일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에게 임명장을 수여하는 모습. 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 |
이정애 | 정치팀장
17대 총선을 앞두고 있던 2004년 3월29일, 박근혜 신임 대표를 비롯한 한나라당 의원들이 서울 여의도 허허벌판에 세운 천막당사에 총출동해 운동화 끈을 바싹 묶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차떼기당’이란 오명,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을 딛고 ‘다시 뛰겠다’는 각오를 보여주기 위한 자리였다.
정당의 위기 국면 때마다 회자되는 그날, 수습기자였던 나는 스케치 기삿거리라도 찾아오라는 지시를 받고 현장에 나가 있었다. 그날 수습기자의 눈에 들어온 건 선거가 끝나자마자 버려지게 될 퍼포먼스용 7천원짜리 운동화가 아니었다. 행사가 끝난 뒤 천막당사 앞에 세워진 한나라당 현판 앞에 홀로 서서 인증 사진을 찍고 있던 김문수 의원의 모습이었다.
그는 그해 총선 공천심사위원장을 맡아 최병렬 대표를 비롯해 중진·실세 의원 수십명을 물갈이한 주역이었다. 지금도 ‘쇄신 공천’의 주요 사례로 거론되는 큰일을 해냈지만, 정작 그는 당의 변화를 예고하는 행사 때 박근혜 대표 옆자리에서 기념사진 촬영을 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당 주류에 섞이지 못한 채 홀로 인증 사진을 찍던 그의 모습은 흡사 물 위에 뜬 한점 기름 같았다. 한때 ‘인천의 레닌’이라고 불렸다는 이 혁명가는 대체 왜 이 정당에 머무는 걸까 오만 잡생각이 교차했다.
20년도 더 지난 기억을 꺼내놓은 건, 그의 입지가 그때랑 별반 다르지 않게 보여서다. 3선 의원, 2선 경기도지사, 고용노동부 장관을 거쳐 국민의힘 대통령 후보까지 됐건만 ‘진짜 주류’들은 민주화운동·노동운동가 출신인 그를 여전히 같은 리그 멤버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꼿꼿 문수’라고 추어올리며 당내 경선 1위에 올려놓았지만, 진짜 주류들에게 그의 쓸모는 한덕수 전 국무총리가 상처 하나 없이 대통령 선거에 등판할 수 있도록 판을 깔아주는 역할, 딱 거기까지였다. 그가 그 기대에 반하는 태도를 보이자 주류들은 “당원들의 신의를 헌신짝같이 내팽개쳤다”, “알량한 후보 자리를 지키기 위해 한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며 강제 후보 교체 시도에 나섰다.
홍준표 전 대구시장은 이를 두고 “용산과 당 지도부가 합작한 공작”이라며 분개했다. “탄핵 대선을 윤석열 재신임 투표로 몰고 가기 위해 한덕수를 띄웠고, (한덕수와의 수월한 단일화를 위해) 만만한 김문수를 밀어줬다”가 사달이 났다는 것이다.
홍 전 시장의 노기 어린 이런 말들은 그저 그런 경선 패배자의 억지 쓰기로만 들리지 않았다. 12·3 내란사태 이후 ‘설마설마’했던 모든 되치기 시도들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착착 맞아떨어지며 일어났기 때문이다. 구속 기간 계산법을 바꿔 내란 우두머리 혐의를 받는 윤석열 전 대통령을 풀어준 판사, 뜬금없이 ‘한덕수 대망론’을 띄운 보수 언론,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을 이례적으로 신속하게 파기환송한 대법원 등등. 많은 이들이 대법원 결정 바로 다음날 잡힌 한 전 총리의 대선 출마 선언일을 ‘기막힌 택일’의 결과라고만 여기지 않았다. 기득권 유지를 위해 헌법과 법률, 규정과 절차 따위는 내 멋대로 주무를 수 있는 수많은 ‘보이지 않는 손’들이 이심전심 격으로 협력한 결과라고 의심한 것이다.
보이지 않는 손들이 이 과정에서 간과한 건, 사람들의 자유의지다. 만만하다고 여겼던 김문수는 불리한 후보 단일화 논의를 거부했고, 동원 대상으로만 취급했던 당원들은 민주적 정당성이 결여된 후보 교체안을 부결시켰다. 최소한의 명분, 후보 등록이라도 제대로 받는 성의를 보였더라면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뼈아픈 일격을 당한 뒤에도 보이지 않는 손들은 여전히 오만하다. 사과 한줄 없었던 윤 전 대통령의 탈당 선언은 그 오만의 극치다. 그런데도 “9회 말 투아웃, 역전 만루 홈런도 가능하다”고 한다. 국민의힘이 이번 대선에서 큰 격차로 패배한다면, 그건 모두 ‘보이지 않는 손’들의 무성의함 때문일 것이다.
hongby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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