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미현 대표가 현암사의 역사를 보여주는 책들을 껴안고 있다. 해방 후 첫 우리글로 만든 법전부터 1963년 29세였던 이어령이 쓴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소설가 황석영이 1970년대 쓴 장길산 초판 등이다. /조인원 기자 |
지난 12일 방문한 서울 마포구 서교동 현암사는 그 자체가 거대한 수장고 같았다. 1959년 한국 최초로 펴낸 법령집인 ‘법전(法典)’이 연도별로 도열해 있고, 고(故) 박경리 작가의 ‘시장과 전장’, 소설가 황석영의 ‘장길산’ 초판 지형(紙型) 등 주옥 같은 명저와 당시 출판상을 엿볼 수 있는 도구가 그대로 보관돼 있었다.
현암사는 1945년 우리말과 글을 되찾은 그해 11월 세워진 해방둥이 출판사다. 현 조미현(55) 대표의 조부인 현암(玄岩) 조상원(1913~2000)이 대구에서 차린 건국공론사가 모태다. 조 대표는 할아버지, 아버지 조근태(1942~2010) 사장에 이어 2009년부터 회사를 맡고 있다. 부불삼대(富不三代)란 말처럼 1대가 일군 성과를 3대가 지키기 쉽지 않은 세상에서, 출판계 3대 경영은 보기 드문 일이다.
조 대표는 “원래는 미대 교수 하는 게 꿈이었다”고 했다. 이화여대에서 섬유미술을 전공하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지만 IMF가 터졌다. “직원들 월급 줄 돈도 없는데 유학비 댈 수 없다”는 아버지 말에 귀국해 현암사 영업부 말단 사원으로 입사했다. “일개 직원이 왜 사장 차 타려고 하느냐”는 아버지 혼쭐에 정장에 구두 신고 버스로 시내 주요 서점 영업을 돌았다.
사장인 아버지와는 한 가지 약속을 했다. 노는 직원을 봐도, 누가 돈을 착복해도 집에 와서 회사 얘기 하지 않기로. “‘원래 사장과 말단 직원은 만날 일이 없다. 말단 직원의 눈으로 본 이야기가 사장에게 새어나가선 안 된다’는 게 아버지 지론이었다. 아버지도 말단 사원부터 시작해 누구보다 이 생리를 잘 알기에 한 약속이기도 했다.”
실제 조 대표는 이 약속을 끝까지 지켰다. 3개월쯤 지나니, 부녀가 내통하지 않는단 걸 알고 직원들이 그 앞에서 사장 흉도 볼 정도였다.
소설 ‘장길산’ 초판 지형. 디지털화되기 전 90년대 초반까지 이를 눌러 판화처럼 책을 제작했다. /조인원 기자 |
출판과 상관없는 분야를 전공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살아온 삶 곳곳이 교육 현장이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조 대표가 받아쓰기를 자꾸 틀려온 일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퇴근길 손녀에게 원고지에 편지를 써서 건넸다. 다시 손녀가 원고지에 답장을 써 출근하는 할아버지에게 전하면, 답장과 함께 그걸 빨간펜으로 교정·교열해 돌려줬다. 이런 편지가 수개월 지속되자 더는 받아쓰기를 틀리지 않았다.
조 대표는 “할아버지는 책 만드는 일을 늘 ‘책바치’에 비유하셨다”고 했다. “가죽 잘 다루는 사람을 갖바치라 하듯, 책 만드는 일도 그런 장인 정신을 가지고 해야 한다는 뜻에서 할아버지가 만든 말”이라고 했다.
그는 “지금도 늘 돋보기를 옆에 두고 교정·교열 보시던 할아버지 뒷모습이 생각난다. 세상이 아무리 빠르게 변해도 진리는 영원한 것처럼,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물려준 정신은 그대로 계승하되, 형태는 요즘 세상에 맞게 새로운 미래로 새롭게 가겠다”고 했다.
이 선포대로 현암사는 올해 80주년에 맞춰 출판사 로고와 글자체까지 바꾼다. 조 대표는 “6월 서울 국제도서전에 간판부터 바꿔 나가겠다”고 했다. “직원들한테 늘 하는 말이 ‘우리 회사가 나이로 치면 팔순이지만, 책은 45세 정도로 만들자’는 것이다. 살아 보니 내 기준에서 가장 좋은 나이가 45~50세더라. 아직 젊음의 용기는 있으면서, 너무 무모하지는 않다. 현암사가 그런 시각으로 책을 내는 출판사면 좋겠다.”
실제 현암사엔 한 번에 많이 팔리며 반짝 주목받는 책보다, 오래도록 사랑받는 책이 많다. 동양의 명저 ‘채근담’은 판형을 바꿔 66년째 나오는 스테디셀러이며, 소설로 읽는 철학이란 부제를 단 ‘소피의 세계’도 성인과 청소년 독자 모두에게 30년째 사랑받고 있다. 안동림의 ‘장자’, ‘이 한 장의 명반’도 각각 32년, 40년째 나오는 대표적인 장수 출판물. 최근엔 김기석 목사의 ‘최소한의 품격’, 이인혜 저자의 ‘씻는다는 것의 역사’가 좋은 평가를 받았다.
80주년 캐치프레이즈는 ‘여전히 든든한 책처럼’이다. 현암사가 지금까지 한국 출판계에 그래온 것처럼 말이다.
[남정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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