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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 보유’ 인도-파키스탄의 극한 갈등에 ‘피’로 물든 카슈미르[글로벌 포커스]

동아일보 임현석 기자,김보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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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슈미르는 왜 78년간 ‘세계의 화약고’가 되었나

인도-파키스탄, 1947년 英서 독립… 전쟁 3차례나 치르는 등 대립 격렬

카슈미르 인구 약 70%가 무슬림… 면적은 인도령이 넓어 분쟁 상존

모디-샤리프 등 양국 지도자들… 정치적 목적으로 갈등 부추겨

美, 中 견제 위해 인도 지지 발언… 中, 경제 협력국 파키스탄 두둔
《인도-파키스탄 ‘78년 분쟁사’

인도와 파키스탄의 영토 분쟁지 ‘카슈미르’를 둘러싼 양국 갈등이 전면전으로 번질 위기에 처했다. 두 나라는 1947년 영국에서 독립한 후 극심한 종교, 역사, 정치 갈등을 빚었다. 특히 카슈미르가 왜 ‘화약고’가 됐는지를 짚어 본다.》




“파키스탄의 핵탄두는 전시용이 아니다. 인도를 겨냥하고 있다.”

인도와 파키스탄의 오래된 영토 분쟁지 ‘카슈미르’를 둘러싼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하니프 아바시 파키스탄 철도장관이 영국 가디언에 인도와 핵전쟁까지 불사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국제사회의 비공식 핵보유국인 두 나라의 갈등이 더 큰 충돌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세계 최대 인구 대국’ 인도와 인도네시아 다음으로 무슬림 인구가 많은 ‘세계 2위 이슬람 국가’ 파키스탄은 1947년 영국에서 독립한 후 78년간 카슈미르를 놓고 격렬하게 대립했다. 지난달 22일 인도령 카슈미르의 파할감에서 발생한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의 테러로 힌두교도 26명이 숨진 뒤 두 나라는 국지적 교전을 벌였다. 이달 7일에는 양측이 미사일 공격을 주고받으며 전면전을 불사할 태세다. 인도는 전투기를 동원한 폭격에도 나섰다.

이처럼 갈등의 중심에 자리한 카슈미르는 히말라야 산맥 서부의 산악 지대다. 면적은 약 22만 km². 한반도와 비슷하다. 고급 의류 소재 ‘캐시미어’는 이곳에 사는 산양 털로 만든다.

카슈미르는 크게 인도 땅인 잠무카슈미르와 라다크, 파키스탄 영토인 아자드카슈미르와 길기트발티스탄, 중국이 실효 지배 중인 아크사이친 등 5개 지역으로 나뉜다. 전체 1300만 여 명 주민 중 약 70%가 무슬림이지만 인도령 카슈미르의 면적이 약 9만5356km²로 파키스탄령 카슈미르(약 5만6003km²)보다 약 4만 km² 넓다. 갈등이 증폭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특히 인도 내 최대 무슬림 거주지 중 하나로 꼽히는 잠무카슈미르가 가장 갈등이 심한 지역이다.

집권 마지막 시기에 양국 갈등을 중재하느라 바빴던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2000년 3월 “카슈미르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라고 주장했다. 이번 양국의 교전을 보노라면 이 말을 실감할 수 있다. 양국 갈등이 영국 식민 지배 시절부터 발발한 뿌리 깊은 종교 및 역사 대립에서 유래한 탓에 이번 충돌 또한 상당 기간 이어질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 종교 민족주의가 갈등 원인


카슈미르는 원래 인도와 파키스탄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토호국이었다. 영국은 식민 지배 내내 ‘이이제이(以夷移夷)’식 통치를 위해 전 인도의 민족 및 종교 갈등을 부추겼다. 1947년 8월 인도와 파키스탄이 모두 영국에서 독립해 독자 국가를 세우면서 양측 갈등이 본격화됐다.

인도의 정치 경제 중심지인 북인도와 파키스탄은 원래 ‘힌두스탄’으로 묶여서 불렸다. 파키스탄의 주요 공용어인 우르두어와 인도의 주요 공용어인 힌디어 또한 언어학적으로 유사하다. 다만 우르두어는 아랍 문자로, 힌디어는 데바나가리 문자로 표기한다. 파키스탄은 정치·종교적 이유로 아랍 문자를 쓰고 우르두어 사용을 장려할 만큼 인도와 구별되는 독자적 정체성을 강조한다.

카슈미르 주민 대부분이 무슬림이어서 파키스탄은 이곳을 처음부터 자신의 영토로 여겼다. 다만 잠무캄슈미르의 군주 마하라자 하리 싱(1895∼1961)은 힌두교도였다. 그는 두 나라 어디에도 속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파키스탄계 민병대가 자신을 공격하자 인도에 병합을 요청했다. 그러자 인도와 파키스탄은 1947년 10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 14개월에 걸쳐 영유권 전쟁을 벌였다. 바로 제1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다.


두 나라는 유엔 등 국제사회 중재로 휴전했다. 유엔은 주민들이 자유롭게 어느 나라를 택할지 투표를 실시하라고 권고했지만 인도가 거부했다. 이 와중에 1962년 중국과 인도가 국경 분쟁을 벌이다 중국이 아크사이친을 점령하면서 상황이 더 복잡해졌다.

카슈미르에서 영토와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던 파키스탄은 1965년 특수부대를 민간인으로 위장시켜 인도령 카슈미르에 침투시켰다. 이후 한 달간 제2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발발했다. 역시 유엔이 휴전을 중재했다.

파키스탄은 독립 당시 현재의 파키스탄인 서(西)파키스탄과 현재의 방글라데시인 동(東)파키스탄으로 나뉘어 있었다. 사회 전반이 서파키스탄 위주로 돌아가는 것에 불만을 가진 동파키스탄은 독립을 시도했다. 인도는 방글라데시의 독립을 노골적으로 지원했다. 그 과정에서 1971년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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