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콘클라베’. 디스테이션 제공 |
박권일 | 미디어사회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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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콘클라베’라는 영화를 봤다. 콘클라베는 전임 교황이 사망한 직후 추기경단이 외부 출입을 봉쇄하고 새 교황을 뽑는 가톨릭교회 특유의 제도로서, 라틴어로 ‘열쇠로 잠긴 방’이라는 의미다. 영화는 가상의 교황이 선종한 뒤 새 교황을 뽑는 콘클라베 기간 일어나는 진흙탕 정치 싸움을 흥미롭게 그린다. 공교롭게도 프란치스코 교황이 얼마 전 세상을 떠났고 5월7일 로마에서는 실제 콘클라베가 시작되었다.
이 영화는 충격적 결말로도 입소문을 탔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교황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유력 후보였던 아데예미 추기경이 과거 성추문 사건이 알려지며 궁지에 몰리다 낙마하는 과정이었다. 이 사건의 폭로는 우연이 아니라 또 다른 유력 교황 후보이자 권모술수의 달인인 바티칸 국무원장 트랑블레가 은밀히 기획한 것이었다. 극을 이끄는 주인공이자 콘클라베를 총괄하는 단장이기도 한 로렌스 추기경은 모든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 아데예미 추기경의 방에 찾아간다. 로렌스의 추궁에 아데예미는 “30년 전 딱 한번이었다”고 애원하지만 단장의 표정은 단호하다. 놀라웠던 건 바로 그다음이다. 잠깐 불꽃처럼 타올랐던 아데예미의 눈빛은 차츰 호수처럼 고요해진다. 그는 더 이상 저항하지 않았다. 그리고 로렌스 추기경에게 자신을 위해 기도를 해달라고 청한다. 누구보다 교황이 되고 싶었던 아데예미의 꿈은 그렇게 끝이 났다.
보통 정치 드라마에서 이런 상황이 나오면 잘못을 딱 잡아떼거나, 억지스러운 궤변으로 자신을 방어하거나, 아니면 원한을 품고 폭주하는 게 다반사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콘클라베 기간 덕망 높은 추기경들의 속내가 얼마나 음험한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던 터라 더욱 놀라웠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아무리 정치적이어도 역시 성직자는 성직자라서 도덕성의 최소 기준이 높은 것일까? 답을 찾을 수는 없었지만 확실한 건 그 장면을 보며 너무나도 치유되는 느낌이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엘리트라면 아무리 망가져도 저 정도의 품위는 있어야지’ 정도의 안도감이랄까. 생각해보면 이 치유감 혹은 안도감은 오랫동안 한국의 엘리트를 보며 느껴온 깊은 절망의 반작용 같은 것일지 모르겠다. 성폭력, 부정부패, 내란을 저지르고도 뻔뻔한 얼굴로 활보하는 정치인들, 심지어 자살을 하면서까지도 일말의 사죄조차 없던 ‘최종적 가해자’들을 보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고 상처받았던가. 저렇게 객관적 사실 앞에 겸허하고 자기 잘못을 선선히 인정하는 엘리트는 한국인에겐 흡사 유니콘 같은 존재다. 물론 교황을 포기한 것으로 책임이 모두 면제되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콘클라베’의 추기경들은 ‘대중이 뽑지 않은 엘리트’다. 원칙적으로 교황 피선거권은 전세계 모든 가톨릭 남성 신도에게 있는데, 선거권은 콘클라베에 참가하는 추기경에게만 있다. 그래서 거의 예외 없이 추기경 중에서 교황이 나오게 된다. 콘클라베는 얼핏 간선제 대통령 선거처럼 보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추기경이라는 임명직 최고위 사제들만 참여하는 투표이므로 엘리트끼리 폐쇄적으로 순환하는 과두정에 가깝다. 조직론의 관점에서 보면 꽤나 부패하기 쉬운 조직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의 분별력과 도덕성은 어떻게 담보될 수 있을까? 그저 문외한의 관찰이겠으나, 적어도 얼마 전 선종한 교황을 보면 저 가톨릭 엘리트들의 안목을 만만히 볼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약하고 고통받는 존재를 한결같이 품에 안았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적 지도자 중 한명이었다.
영화가 끝나자 한국의 선출되지 않은 엘리트들이 떠올랐다. 전례 없이 해괴한 계산법을 적용해 내란범의 구속을 취소하고 유권자의 관점을 자의적으로 판단하여 선거에 개입하는 법관들을 보면, 저들의 분별력과 도덕성에 근본적인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멕시코처럼 판사를 100% 선거로 뽑으면 해결될까? 그러면 판사들은 재판보다 선거에 골몰하게 될 것이다. 비선출 엘리트는 삼권분립의 한 축이며 소수자·약자에 대한 다수의 억압을 막는 보루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어렵더라도 사법 독립성과 민주적 통제 사이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 롤러코스터 같은 정국이지만 이럴 때일수록 잊지 말아야겠다. 대통령보다 중요한 건, 다시 만들 세계를 향한 담대하되 주도면밀한 상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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