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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직원들, 1억7000만원 보이스피싱 막았다”

헤럴드경제 정호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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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 막은 수협 직원 3인 인터뷰
영업점·중앙회 공조로 인출책 잡아
피해액 64%인 1억1000만원 회수
“고객과 신뢰 통해 골든타임 지켜”
수협 남가좌지점의 최가은(27)·강소정(30·이상 가명) 대리가 작성한 보이스피싱 의심 사례 공유 글. 수협 사내 게시판에 게재된 이 글을 본 임직원들은 즉시 남가좌지점에 의심 사례 여부를 확인하는 문의를 보내며 공조에 나섰다.  정호원 기자

수협 남가좌지점의 최가은(27)·강소정(30·이상 가명) 대리가 작성한 보이스피싱 의심 사례 공유 글. 수협 사내 게시판에 게재된 이 글을 본 임직원들은 즉시 남가좌지점에 의심 사례 여부를 확인하는 문의를 보내며 공조에 나섰다. 정호원 기자



“금융감독원입니다. 본인 명의가 도용됐습니다. 해당 사고에 대해 본인이 직접 금전적인 책임을 져야 합니다. 수사에 협조하기 위해 보안을 철저히 유지하시고 협조해 주십시오.”

지난달 2일 서울 서대문구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60대 이모 씨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금융감독원’ ‘명의 도용’이라는 단어에 당황한 그의 머릿속에는 “큰일이 났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전화 속 인물은 “금감원 직원”이라며 “현재 사건은 극비 수사 중이니 가족은 물론 금융기관에도 절대 말하지 말고 보안을 철저히 유지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이어 “사태 해결을 위해 1억7000만원을 수표로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꼬박 하루 동안 ‘수사협조’를 명목으로 보이스피싱 조직의 전화에 시달린 이씨는 다음날인 지난달 3일 예금을 맡겨둔 서울 서대문구 수협 남가좌지점을 방문했다. 그는 돈을 인출한 뒤 “금감원에 직접 찾아가겠다”고 했지만, 상대는 “극비 수사이니 절대 방문하지 말고, 파견한 직원을 인근에서 만나라”고 했다. 이씨는 안내받은 대로 인근 한 초등학교 앞에서 오후 2시에 한 여성을 만나 수표를 건넸다.

이씨가 수협 남가좌지점을 찾은 날, 최가은(27·가명) 대리는 ‘보이스피싱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떨칠 수 없었다. 60대 이상 고령 고객이 예금을 중도 인출하는 경우는 드물었기 때문이다. 다만 고객의 요청을 거절할 명분이나 방법이 없던 최 대리는 결국 예금을 해지해 수표로 발행했다.

문제는 그 다음날인 지난달 4일 발생했다. 서울 서부의 수협·농협 지점은 물론 인천 소재 지점으로부터 “어제 발행된 수표를 현금화하러 온 고객이 있는데 정상 거래가 맞느냐”는 문의 전화가 잇따랐다. 더 큰 문제는, 수표를 들고 온 사람이 이씨가 아니라 2001년생과 2005년생 김모 씨였다는 점이다. 이들은 보이스피싱 조직의 현금 인출책이었다. 최 대리는 “전날 ‘이씨 아들의 사업자금’이라던 수표를 하루 만에 생면부지의 20대 초반의 청년들이 들고 나타난 점이 수상했다”고 말했다.


범죄 조직의 수법은 치밀했다. 1억원짜리 수표를 1000만원 단위로 나눠 여러 지점을 돌며 현금으로 바꾸는 ‘수표 쪼개기’ 방식을 사용한 것이다. 금액을 나누면 직원의 의심을 덜 수 있다는 점을 노린 수법이다.

보이스피싱 조직이 수표를 현금화하기 전에 차단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최 대리와 같은 지점의 강소정(30·가명) 대리는 서울 서부권과 인천권 등 40여 개 지점에 ‘보이스피싱 주의’ 메시지를 띄우고 수표 발행 지점, 인출책의 특징 등을 메신저로 신속히 공유했다. 특히 현금인출책이 ‘주민등록증 임시발급증’을 제시하며 신분을 숨기는 수법이 활용된다는 제보를 받아, 해당 특징도 함께 전달했다. 조직은 다른 지점을 돌며 추적을 피하려고 임시발급증을 악용한 것으로 파악됐다.

서울 은평구 수협 구산동지점의 정민경(30·가명) 대리도 최 대리와 강 대리가 발송한 경고 메시지를 접한 인물 중 한 명이었다. 곧이어 정 대리는 최 대리에게 전화를 걸어 “2005년생 손님이 방금 지점에 방문했는데 보이스피싱 우려 대상과 일치하는 것 같다”고 알렸다. 정 대리는 경찰에 신고를 한 뒤, 현금인출책에게는 “수표 확인에 시간이 걸린다”며 “앞선 고객을 먼저 응대하겠다”고 말하며 시간을 벌었다.


약 5분 만에 경찰이 현장에 도착했다. 인출책은 “문화상품권 판매대금”이라고 둘러댔지만, 인출책이 소지한 수표는 사전에 공유된 보이스피싱 피해 수표 번호와 정확히 일치했다. 당시 인출책이 소지하고 있던 수표 금액은 7000만원에 달했다. 수협 측은 자기앞수표 사고등록를 해 추가적인 피해로 확산되지 않도록 사전에 차단했다.

피해자 이씨는 사건 이후 경찰과 통화를 통해 자신이 보이스피싱 피해자였음을 뒤늦게 인지했다. 며칠 전 ‘이씨 명의로 신용카드가 발급됐다’는 안내 문자를 받고 아무 의심 없이 첨부된 링크를 클릭한 것이 발단이었다. 이후 범죄 조직은 금감원을 사칭하며 접근했고, 수협 직원의 확인 전화나 경찰 개입 가능성까지 사전에 예견하며 이씨에게 ‘상황별 행동 매뉴얼’을 강요하는 등 치밀하게 심리를 조종했다.

수협 임직원들의 신속한 대응 덕분에 이씨는 총 피해액 1억7000만원 중 1억1000만원을 회수할 수 있었다. 며칠 뒤 이씨는 다시 수협을 찾아 감사 인사를 전하며, 회수된 금액을 재예치했다. 현재 경찰은 나머지 피해금액 회수와 더불어, 보이스피싱 핵심 조직원을 잡기 위해 수사망을 좁혀가고 있다.


‘어떻게 그 급박한 상황에서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었느냐’는 질문에 세 사람은 “내부적으로 긴밀히 소통하고, 고객을 주의 깊게 살폈을 뿐”이라고 말했다.

직원들은 보이스피싱 대응 역량을 키우는 데 가장 큰 도움이 된 요소로 ‘지속적인 예방 교육’을 꼽았다. 정 대리는 “수협은 월 2~3회 보이스피싱 사례와 대응 방안을 교육하고 있어, 사전에 유사 사례를 접했던 것이 큰 도움이 됐다”고 설명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누구나 보이스피싱의 타깃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절감했다는 직원들은 가장 중요한 예방책으로 ‘의심하는 자세’를 강조했다. 강 대리는 “청첩장이나 부고 문자에 첨부된 링크는 절대 누르지 말고 직접 당사자에게 확인하거나 수협 창구 등을 방문해 직원에게 문의하길 권한다”고 말했다.

일선 창구를 찾는 고객 입장에서 피해를 막기 위한 첫걸음은 ‘직원과의 솔직한 소통’이었다. 최 대리는 “일부 고객은 ‘왜 해지 이유를 묻느냐’며 불쾌해하기도 하지만, 이런 질문이야말로 피해를 막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선이기 때문에 창구 직원과 적극 소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정호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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