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로 건너뛰기
뉴스
서울
맑음 / -3.9 °
조선일보 언론사 이미지

[특파원 리포트] 유튜브 음모론과 싸우는 日의원

조선일보 도쿄=성호철 특파원
원문보기
지난달 23일 만난 마루오 마키 현의원은 인터뷰 직전,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곤 소형 녹음기의 버튼을 눌렀다. 90분간 인터뷰를 끝내곤 ‘같이 사진 찍자’는 그의 제안에 선뜻 승낙했다. 한국 기자와의 인터뷰를 의정 활동에 넣기 위해서가 아니다. 유튜브와 엑스(구 트위터)의 온갖 비방과 음모론에 시달려온 그에겐 특파원도 ‘날조할지도 모르는 위험 인물’이었을 테고 둘이 만난 증거 사진이 필요했을 것이다.

극심한 경계심을 보인 그와 헤어질 때 말을 하려다가 삼켰다. “부디 끝까지 죽지 말고 버티시라.” ‘죽음’이란 단어를 내뱉기 두려웠다. 마루오 현의원은 올해 1월 자살한 다케우치 히데아키 전(前) 현의원의 동료다. 두 사람은 작년 사이토 모토히코 효고현 지사의 갑질·횡령 의혹이 터졌을 때 진실을 파헤친 지역 정치인이다. 계기는 효고현 한 관료의 내부 고발과 죽음이었다. 사이토를 고발했다가 권력자인 사이토에게 ‘거짓말쟁이’로 낙인찍히고 징계 처분을 받은 이 관료는 ‘죽음으로써 항의한다’는 유서를 남겼다. 그제서야 300여 명의 현청 공무원이 실명으로 사이토의 갑질을 증언했다. 현의회는 의원 만장일치로 사이토 불신임안을 가결했다.

마루오와 자살한 다케우치의 지옥은 이때 시작됐다. 작년 11월 보궐선거에 재출마한 사이토를 지지하는 선거 유튜버들은 ‘기득권이란 거대 어둠에 홀로 맞선 사이토’라는 프레임을 만들었다. 두 현의원을 경찰·폭력 조직·언론과 결탁해 사이토에게 없는 혐의를 뒤집어씌운 흑막(黑幕)이라고 공격했다.

‘고발했다가 자살한 관료는 10명의 여성과 불륜했는데 한 명은 좀 이상했다더라’ ‘유서는 누군가 대필했다더라’ ‘날조한 사람이 마루오라는 소문도 있다’는 식이었다. 비방에 시달리면서도 마루오와 다케우치는 유권자의 옳은 선택을 바랐지만 그들은 ‘갑질 의혹은 조작’이라는 유튜브 음모론을 믿었다. 사이토는 45%를 득표해 재선했고 유튜브의 비방은 더 심해졌다. 못 견딘 다케우치는 1월 18일 밤 자살했다.

동료의 죽음에 대해 마루오 현 의원은 “그와 나의 판단 중, 무엇이 최선이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죽지 않고 유튜브의 비방과 유튜브 신봉자들의 공격을 견디는 삶을 선택한 본인에 대한 연민이었다. “지금도 ‘죽어라’라는 이메일이 와요. 아마도 영원히 유튜브의 거짓말과 싸우게 될지 모르겠네요.” 지난달 마루오는 ‘자살하라’ ‘너는 쓰레기’라는 1만2000건의 이메일에 대해 ‘업무 방해 혐의’로 경찰 고발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은 오롯이 그의 몫이며, 오늘도 그는 누군가 앞에서 주머니 속 녹음기 버튼을 누르고 있을 것이다.

대통령 선거를 앞둔 우리의 현재를 생각한다. 소셜미디어의 음모론에 휘둘리지 않을 한국 유권자의 현명함을 믿을 뿐이다.

[도쿄=성호철 특파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info icon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AI 이슈 트렌드

실시간
  1. 1신은경 이진호 체납
    신은경 이진호 체납
  2. 2대통령 통일교 겨냥
    대통령 통일교 겨냥
  3. 3강훈식 K방산 4대 강국
    강훈식 K방산 4대 강국
  4. 4쿠팡 블랙리스트 의혹
    쿠팡 블랙리스트 의혹
  5. 5KB손해보험 카르발류 감독 사퇴
    KB손해보험 카르발류 감독 사퇴

조선일보 하이라이트

파워링크

광고
링크등록

당신만의 뉴스 Pick

쇼핑 핫아이템

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