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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공에서의 하루 “여기 사람이 있다” [6411의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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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지난 3월1일 서울 명동 세종호텔 앞 고공농성장을 찾아준 동지들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 있다. 세종호텔지부 제공

필자가 지난 3월1일 서울 명동 세종호텔 앞 고공농성장을 찾아준 동지들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 있다. 세종호텔지부 제공




고진수 |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관광레저산업노조 세종호텔지부장





아침 5시30분, 눈을 뜹니다. 알람은 6시30분에 맞춰놨지만, 항상 그보다 일찍 눈이 떠집니다. 지난 2월13일 서울 명동 지하차도 차단기 철제 구조물 위로 올라온 뒤 오늘은 여기서 맞는 82일차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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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5개월 전쯤 명동 세종호텔이 저를 포함해 민주노조 조합원만 골라 12명을 해고했습니다. 잘못한 것도 없이 20년을 일한 곳에서 쫓겨났는데 법원과 노동부는 우리의 억울함을 풀어주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사쪽은 노동조합의 교섭 요청에 한번도 응하지 않았습니다. 3년5개월간 저희는 길바닥에서 구호를 외치고 행진하고 기도하고 밥 먹고 잠을 자며 “해고 철회”를 외쳤습니다. 아무리 해도 되지 않았고 제 안에 맺힌 뭔가는 점점 커지고 단단해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세종호텔이 바로 보이는 이곳으로 올라와 고공농성을 시작했습니다.



아침, 점심, 저녁 하루에 세번 선전전을 합니다. 아래에 있는 동지들이 투쟁가를 틀면, 그 소리를 듣고 저는 북을 챙겨서 나옵니다. 어렸을 때 학교에서 북 치는 수업을 들어서 지금도 칠 줄 압니다. 선전전 하는 1시간 내내 북을 칩니다. 하루 중 유일하게 운동하는 시간이라 힘들진 않습니다. 제 북소리가 꽤 커서 사람들이 많이 쳐다보는데, ‘여기에 사람이 있다!’라고 북소리로나마 외치는 거 같아서 좋습니다.



하루에 두번 식사가 올라옵니다. 운동량이 많지 않으니까 세끼를 다 챙겨 먹으면 속이 부대낍니다. 아침엔 개신교대책위원회가 올려주시는 도시락으로 식사합니다. 저녁엔 조합원이 챙겨주는 식사를 할 때도 있고 연대해주시는 수녀님께서 만들어 오신 음식을 먹을 때도 있습니다. 저도 20년간 호텔 주방에서 일했던 터라, 누군가를 위해 매일 밥하는 일의 어려움을 압니다. 항상 고맙게 먹고 있습니다.



식사가 끝나면, 요리조리 몸을 움직여서 양반 자세로 앉습니다. 제가 있는 철제 구조물은 쇠몽둥이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양반 자세로 허리를 펴고 앉으려면, 쇠몽둥이들 사이로 머리를 내밀어야 합니다. 공간이 좁아서 자세를 잡는 데 시간이 꽤 걸립니다. 그렇게 앉아 휴대전화로 아래에 있는 동지들 이야기를 찾아보고 뉴스도 봅니다. 뉴스에선 세상이 빠르게 바뀌고 있다는데 도대체 뭐가 바뀌었다는 건지 답답합니다. 답답한 머리를 비우려고 고개를 흔들다가 쇠몽둥이에 머리를 박은 적도 있습니다. 머리를 비우려고 아래에 있을 때 보기 힘들었던 예전 드라마를 정주행하기도 합니다.



저 혼자만 고공농성을 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한국옵티칼하이테크지회의 박정혜 동지와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의 김형수 동지도 고공에 있습니다. 일주일에 두세번, 각자의 고공에서 영상 통화로 얼굴을 봅니다. 불탄 공장 옥상과 30m 높이 폐회로텔레비전(CCTV) 철탑에 있는 동지를 보면 제 마음도 안 좋습니다. 그래도 영상 통화는 재밌습니다. 각자 환경이 조금씩 달라도, 고공인 건 똑같으니까 차마 아래에 있는 동지들한테는 못 하는 이야기도 서로 나눕니다.



위에 있으니까 미안한 사람이 많습니다. 특히 아내에게 미안합니다. 아내가 작은 가게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아래에 있을 땐 나름 많이 도와줬는데, 지금은 그럴 수 없으니 미안할 뿐입니다. 아래에서 고생하는 허지희 사무장, 김란희 조합원에게도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큽니다. 애써주는 활동가 동지들, 연대해주는 동지들도 고맙고요. 그럼에도 조합원·연대 동지들에게 당부할 말이 있습니다. 애쓰는 만큼 성과를 내는 게 중요합니다. 제가 위에 있는 동안, 저는 버티는 투쟁을 하겠습니다. 회사와도 싸우는 것이지만, 나와의 싸움에서도 이기겠습니다. 동지들은 아래에서 성과를 내어 복직할 수 있는 투쟁을 해주십시오.



마지막으로 세종호텔에서 아직 일하고 있는 동료들에게 몇자 적겠습니다. 크고 작은 싸움을 많이 하면서 우리는 서로 미워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다들 10년 넘게 세종호텔에서 일했으니 호텔이 10년 전과 비교하면 이미지도, 서비스 품질도, 노동 조건도 다 망가졌고 그건 노동자 숫자를 과도하게 줄여서 노동 강도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기 때문이란 걸 솔직히 다들 알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호텔이 고객에게 사랑받고, 우리에게도 좋은 일터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동료 여러분도 다 알고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세종노조는 열려 있습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삶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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