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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은수의 책과 미래] 나는 얽혀 있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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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 사유란 무엇인가. 그건 사물과 사물의 연결을,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는 방법이다. 이는 일상의 사고와 가장 먼 거리에 있다. 평소 우리는 빤하고 흔하고 익숙한 경로에 의지해 세상을 보고, 벌어진 사건을 해석하며, 친숙한 해법을 좇는다. 타고난 대로 살고 정해진 대로 사고할 때, 삶을 바꾸는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다른 인생도, 다른 세상도, 다시 생각하고 고쳐 읽는 삶에서만 가능하다.

'시와 물질'(문학동네 펴냄)에서 나희덕 시인은 세상 만물이 모두 홀로 있지 않고 서로 연결돼 하나로 엮여 있다고 말한다. "나는 얽혀 있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거미불가사리'). 우리는 얽힘의 존재로서 서로에 대해 때로는 반응하고, 때로는 도망치고, 때로는 다가가고, 때로는 교신하면서 살아간다. 따라서 우리가 무슨 관계로 존재하는지, 어떻게 얽혀 있는지를 깊게 따져보는 것은 중요하다. 표제작을 포함해 이 시집의 많은 시가 '닭과 나' '밤과 풀' '바다와 나비' '피와 석유' '산호와 버섯' 같은 제목을 달고 있는 건 이 때문인 듯하다. 시인은 조사 '와/과'를 재료 삼아 우리가 현재 어떻게 얽혀 있는지를 돌이켜 성찰한다.

익숙한 대로만 사고할 때, 세상 모든 관계는 계산적·이기적으로 느껴진다. 심지어 공생조차 그렇다. "공생은 서로 돕는 게 아니라/ 이용하고 착취하는 거라고 진화생물학자들은 말하지요/ 적은 비용으로 최대한 이득을 보도록/ 모든 생물종은 설계되었다고"('진딧물의 맛'). 개미와 진딧물의 관계는 효율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나 타자를 괄호 치고 내 이득만 바라보는 얽힘은 "땅속에서 쉬지 않고 뽑아 올리는 죽음의 주스"('피와 석유')로 공기를 데워 산불과 폭염을 일으키고, 미세 플라스틱으로 뒤덮어 바다를 살해했다. 그 탓에 우리는 "여섯 번째 멸종의 취약한 목격자들"('여섯 번째 멸종')이 되었다.

이와 달리 시인은 개미와 진딧물 간에 다른 얽힘을 떠올린다. "요즘 내가 궁금한 것은/ 진딧물의 맛// 개미의 더듬이가 진딧물을 스칠 때/ 진딧물은 어떤 표정을 지으며 즙을 내뿜는지//(중략)//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것인지". 이렇듯 우리는 이타와 사랑을 중심으로 관계를 고쳐 쓰고, 우리를 "온몸이 귀로 이루어진" 경청의 존재로 길들일 수 있다. 나와 타자가 얽힐 때, 거기서 무엇을 읽어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다. 시인은 말한다. "우리의 발견은/ 물질들의 새로운 연관성을 보여주었을 뿐입니다"('시와 물질'). '와/과'를 성찰하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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