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대근(한국외대 컬처?테크융합대학장) |
황가람의 노래 '나는 반딧불'이 잔잔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한 번 들으면 쉽게 잊히지 않는 멜로디와 반복되는 가사를 따라가다 보면 여러 심상이 떠오른다. 무엇보다 '나는 내가 빛나는 별인 줄 알았어요. 몰랐어요, 난 내가 벌레라는 것을'이라는 가사는 많은 이의 마음을 붙잡는다. 경쾌한 댄스음악이 주류가 된 K팝의 유행 속에서 또박또박 들리는 노랫말이 대중가요의 중요한 조건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이 노래는 반딧불과 별이라는 비유와 상징을 통해 자기 정체성의 혼란과 거기서 뿜어져나오는 고유한 빛을 이야기한다. '나는 별인 줄 알았다'는 첫 문장은 자존감의 순수한 확신처럼 들린다. 반면 '벌레라는 것을 몰랐다'는 뒷 문장은 확신의 균열을 드러낸다. 확신과 균열의 틈새는 우리가 살아가며 겪는 성장통, 사회적 절망, 자기 인식의 낙차에서 비롯한다.
그러나 노래는 단순한 자조나 추락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래도 괜찮아, 나는 눈부시니까.' 반복되는 이 구절은 상대적으로 존재하는 위치가 다르더라도 그 존재의 '빛'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발견의 문장이다. 별만이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작은 빛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삶을 지속할 수 있다는 믿음이 여기에 담겨 있다. 자신의 존재가치는 외부의 평가나 타인이 보기에 이상적인 위치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
'별'은 하늘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는 원대한 꿈과 이상, 혹은 존재의 절대적 가치를 상징한다. '반딧불'은 풀숲의 어둠 속에서 작고 조심스럽게 반짝이는 현실의 자아를 의미한다. 둘은 위치도 크기도 존재감도 다르지만 '빛난다'는 사실만은 같다.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반딧불이 됐을지라도 그 빛은 여전히 우리 곁에 머물며 어둠을 밝힌다.
이 노래는 고전적인 자존감 담론과도 닿아 있다. 심리학자 칼 로저스는 자신을 신뢰하면서 실존적인 삶에서 가치를 찾아야 자기실현을 이룰 수 있다고 봤다. 그것이 곧 자존감이다. 반딧불은 별이 아니기에 빛나지 못하는 게 아니다. 반딧불 자체로 충분히 빛나고 있다는 통찰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긍정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로저스는 타인의 기준에 맞추려는 강박에서 벗어나 자신의 기준을 스스로 세우고 자율적으로 성장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눈부시니까'라는 가사에서 느껴지는 단단한 자기 확신은 조건 없는 자기 수용을 통해 내면의 중심을 회복하는 과정이다. 우리에게 끊임없이 '별이 돼라'고 요구하는 이 시대에 이 노래는 '반딧불로도 괜찮다'는 메시지의 강력한 대항이 된다.
노랫말은 오늘날 Z세대의 정서와도 깊이 맞닿아 있다. 자신을 브랜드로 만들어야 하는 압박, 화려한 소셜미디어 위에서 타인의 삶과 비교되는 현실에서 별이 아니라는 자각은 때로는 좌절을 낳는다. 그러나 '나는 반딧불'은 그 좌절의 순간에 되묻는다. '그래도 괜찮아, 나는 눈부시니까.' 이는 자기 비하를 통한 위안이 아니라 낮은 자리에서 발견한 주체적인 빛에 대한 고백이다.
'나는 다시 태어났지'라는 고백은 일종의 전환이다. 자아인식의 과정에서 우리는 때때로 무너지고 환상에서 깨어난다. 그러나 그 깨어남은 새로운 생성을 예비한다. 그 별이 개똥벌레였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자기 삶의 조명을 스스로 찾아내는 반딧불이 된다. 작고 유한하지만 너무나도 인간적인 개똥벌레가 거기서 빛난다.
황가람의 '나는 반딧불'은 거창하지 않다. 그러나 이 시대의 자화상을 조용히, 하지만 정확하게 비춘다. 반딧불은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빛이 아니라 자신의 앞길을 비추기 위한 최소한의 희망이다. 그 작은 빛이야말로 우리가 버티고 살아갈 수 있는 이유다. 우리가 별이 아니라 해도 여전히 빛날 수 있음을 믿게 하는 노래를 들으며 위로와 확신을 얻는다. 그 빛은 누구의 것도 아닌 우리 자신의 어둠을 밝히기 위한 반짝임이다.
임대근 한국외대 컬처·테크융합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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