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수영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
어두운 밤길을 걸을 때 골목길 주택의 창문들은 올려다보지 않는 편이 좋다. 불 꺼진 창문이 가끔은 숨은 관찰자의 시선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서다. 창의 시선은 양방향으로 투명하지 않다. 나는 볼 수 없는데 누군가가 나를 지켜본다면 섬뜩하기도 하고 불쾌해진다. '훔쳐보기' 또는 관음증을 뜻하는 '피핑 톰'(Peeping Tom) 역시 창문으로부터의 시선과 관계한다.
영국이 북유럽 데인인(Dane人)들의 통치를 받던 11세기 즈음 농민들은 가혹한 세금으로 거의 농노 수준으로 전락했다고 한다. 당시 한 지역 영주의 부인 고다이바(Godiva)가 백성들의 고통을 두고 볼 수 없어 남편에게 세금감면을 요청했다. 영주는 부인을 조롱하며 만일 그녀가 벌거벗은 몸으로 마을을 한 바퀴 돈다면 세금을 탕감해주겠다는 조건을 건다. 고다이바 부인이 알몸으로 말에 올라 마을을 행진하는 동안 마을 사람들은 모두 커튼을 내리고 밖을 내다보지 않음으로써 자신들을 위해 용기를 낸 그녀를 지켜주기로 한다. 하지만 몰래 창문 틈으로 그녀를 훔쳐본(peeping)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마을의 재단사 톰이었다.
'피핑 톰'은 보는 자의 '욕망'은 떳떳하지 못하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지만 창문을 열어놓는 시선의 가능성은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의 삶을 바꿔왔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관념 속 진리에서 벗어나 자연이나 현실세계로 시선을 돌리고자 한 르네상스 시기, 회화를 위해 사용된 '세상을 향해 열린 창'이라는 은유를 떠올려보자. 이는 인간이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통찰하는 도구로서 시선을 재평가하게 됐음을 증명하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시각 중심 문화를 이해하는 단초가 된다.
물론 캔버스나 화면으로 등치되는 창문의 상은 정말 우리 눈에 맺히는 이미지라기보다 논리와 이성이 투시한 세상의 모습에 가깝다. 창문 너머의 세계는 직접 발로 뛰어들어가 경험하는 세계와 다르다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항상 '현혹'이나 '미혹'의 위험과 동일시된 '시선'이 이성과 통찰의 한 능력으로 소구됐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잘 보는 것', 아니 '볼 수 있다는 것, 그 자체'의 효용을 추구한 것은 공리주의 철학자 벤담(Jeremy Bentham)이었다. 그의 유명한 장치, 판옵티콘(panopticon)은 원형 건물의 방사형으로 나뉜 칸막이 방에 수감자를 두고 어두운 중심에 감시자가 위치하는 구조다. 창문을 두고 보는 자와 보이는 자가 나뉘었던 것처럼 여기서도 시각능력은 불평등하다. 수감자 쪽은 사각지대가 없어 완전히 간수에게 노출되지만 수감자는 간수를 볼 수 없다. '방범카메라'처럼 감시자가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수감자는 완벽히 통제된다.
권력이었던 훔쳐보기는 오늘날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대중화됐다. 편재하는 소셜미디어는 한술 더 떠서 '노출' 가능성 역시 권력으로 만들었다. 20세기 말에는 몰래카메라나 CCTV 같은 기계적 시선들의 판옵티콘적 성격에 대한 우려가 컸다. 우리의 사적인 활동들이 자신도 모르게 포착될 수 있다는 사실이 불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사람에게 '카메라 작동 중'이라는 팻말은 불편함보다 안심을 의미한다.
우리는 TV, 컴퓨터, 스마트폰 등 수많은 화면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창을 열고닫는다. 이런 창들이 향해 있는 디지털 광장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가장 이상적인 규범과 합리적인 의견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건강한 감시가 이뤄지는 공적 영역이 가능할까. 여전히 인터넷에는 악랄한 가짜뉴스와 정화되지 않은 감정의 배설물이 넘쳐난다. AI 친구와의 채팅창들이 일상화한 오늘날, 온실효과 없는 맑은 하늘과 청명한 시야를 담은 깨끗한 창의 모습이 그리워진다.
남수영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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