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 동해시 묵호·한섬
여름철 피서객이 찾기 전, 잔잔한 봄의 바다는 숨겨진 매력이 있다. 맑고 청량한 바닷물과 해돋이 명소로 꼽히는 겨울철 대표 관광지 동해의 봄은 매서운 추위를 피해 바닷가 천혜의 절경을 온전히 즐길 수 있는 계절이다. 강원 동해시의 묵호항 남쪽 해안선에는 동해의 아름다움을 집약한 길이 있다. 봄볕에 빛나는 하얀 백사장부터 파도에 깎인 해식애와 파도소리 메아리치는 몽돌해변까지. 3km 남짓의 해안선에 5개의 각기 다른 매력을 지닌 보물 같은 해변이 몰려 있다. 1979년 동해항이 개항하기 전까지 지역 거점 항구 역할을 했던 묵호항은 현재 동해항의 보조항으로만 기능한다.
봄 바다 탐방의 시작은 묵호항 남단에 인접한 하평해변이다. 묵호역에서 1.5km 남짓의 거리다. 200m 길이의 고운 모래사장과 열차 선로가 나란히 놓여 있어 여행의 정취를 살린다. 하평해변 중심에는 바다를 향해 갯바위들이 우뚝 솟아 있다. 낚시꾼들이 월척을 기다리기도 하는 이 갯바위는 거센 파도를 막는 천연 방파제 역할을 한다. 덕분에 하평해변은 물길이 잔잔한, 이따금 지나는 열차 소리 말고는 별다른 소음 없이 평화롭다. 이곳을 찾은 이들은 모래사장에 누워 단잠에 빠지거나 바닷소리를 음악 삼아 독서를 한다. 북적이는 관광지보다는 동네 주민의 앞바다 같은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해변에서 올라 둘레길(해파랑길 33구간)을 따라 남쪽으로 걷기 시작하면 금세 풍경이 반전된다. 하평해변을 보호하는 갯바위와 방파제를 지나면 동해의 파도가 거칠게 깎은 해식애(해안 절벽)가 이어진다. 파도가 몰아치고, 남은 물기가 흡수되고 얼고 녹으면서 절벽을 울퉁불퉁하게 조각했다. 험한 지형과 소금기 가득한 해풍에도 절벽 위에는 침엽수와 잡초·덤불 등이 덮고 있다.
편집자주
일상이 된 여행. 이한호 한국일보 여행 담당 기자가 일상에 영감을 주는 요즘 여행을 소개합니다.강원 동해시 몽돌해변은 주위의 숲에 가려져 있다.강원 동해시 몽돌해변은 주위의 숲에 가려져 있다. |
여름철 피서객이 찾기 전, 잔잔한 봄의 바다는 숨겨진 매력이 있다. 맑고 청량한 바닷물과 해돋이 명소로 꼽히는 겨울철 대표 관광지 동해의 봄은 매서운 추위를 피해 바닷가 천혜의 절경을 온전히 즐길 수 있는 계절이다. 강원 동해시의 묵호항 남쪽 해안선에는 동해의 아름다움을 집약한 길이 있다. 봄볕에 빛나는 하얀 백사장부터 파도에 깎인 해식애와 파도소리 메아리치는 몽돌해변까지. 3km 남짓의 해안선에 5개의 각기 다른 매력을 지닌 보물 같은 해변이 몰려 있다. 1979년 동해항이 개항하기 전까지 지역 거점 항구 역할을 했던 묵호항은 현재 동해항의 보조항으로만 기능한다.
강원 동해시 하평해변. 위에서부터 영동선 철길, 묵호항선 폐구간, 해변 갯바위가 보인다. |
강원 동해시 묵호등대 북쪽 상공에서 바라본 묵호항 일대. |
봄 바다 품은 묵호항
봄 바다 탐방의 시작은 묵호항 남단에 인접한 하평해변이다. 묵호역에서 1.5km 남짓의 거리다. 200m 길이의 고운 모래사장과 열차 선로가 나란히 놓여 있어 여행의 정취를 살린다. 하평해변 중심에는 바다를 향해 갯바위들이 우뚝 솟아 있다. 낚시꾼들이 월척을 기다리기도 하는 이 갯바위는 거센 파도를 막는 천연 방파제 역할을 한다. 덕분에 하평해변은 물길이 잔잔한, 이따금 지나는 열차 소리 말고는 별다른 소음 없이 평화롭다. 이곳을 찾은 이들은 모래사장에 누워 단잠에 빠지거나 바닷소리를 음악 삼아 독서를 한다. 북적이는 관광지보다는 동네 주민의 앞바다 같은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강원 동해시 하평해변 남단 방파제 옆으로 영동선 철길이 지나고 있다. |
강원 동해시 하평해변 모래사장을 찾은 시민들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보거나 누워 있다. |
해변에서 올라 둘레길(해파랑길 33구간)을 따라 남쪽으로 걷기 시작하면 금세 풍경이 반전된다. 하평해변을 보호하는 갯바위와 방파제를 지나면 동해의 파도가 거칠게 깎은 해식애(해안 절벽)가 이어진다. 파도가 몰아치고, 남은 물기가 흡수되고 얼고 녹으면서 절벽을 울퉁불퉁하게 조각했다. 험한 지형과 소금기 가득한 해풍에도 절벽 위에는 침엽수와 잡초·덤불 등이 덮고 있다.
강원 동해시 가세해변 파식대에 울퉁불퉁하게 난 돌개구멍과 침식 흔적들. |
하평해변 남단에서부터 500m가량을 더 걸으면 근방 해변 중에서도 가장 고즈넉한 가세해변이 나온다. 하평해변보다 모래의 알갱이가 더 굵다. 암초도 더러 있어 거친 바다의 느낌이다. 가세해변의 갯바위에는 무수한 돌개구멍(마린 포트홀)이 눈길을 끌고, 해식애에 격자로 그어진 절리도 이색적이다. 가세해변부터 동해시의 명소 '한섬'이 시작된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온 듯한 지형으로 '육지의 섬'이라 해서 한섬으로 부른다.
자연의 조각 전시, 고불개해변
강원 동해시 고불개해변 갯바위 정상에 바람에 쓰러진 듯한 나무가 비스듬히 자라 있다. |
강원 동해시 고불개해변의 갯바위(오른쪽)와 해식애 사이에 시스택이 우뚝 서 있다. |
가세해변부터 200m 남짓 걸으면 한섬의 꽃인 고불개해변이 나타난다. 해변의 갯바위들은 마치 작은 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듯한 모습이다. 바위 틈새로 해안동굴이 형성돼 신비로운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계단처럼 층층이 침식된 바위와 넓은 파식대(수면과 수평인 암석 지형) 등이 절경을 이룬다. 바위 정상에 반쯤 쓰러진 나무가 화룡점정이다. 고불개해변은 갯바위에 잔뜩 달라붙은 따개비와 담치에 이끌린 감성돔들이 모여들어 낚시꾼들의 성지로도 불린다.
이 갯바위로 이어지는 모래사장을 뚫고서 3개 층으로 끊어진 해안단구가 비스듬히 돌출돼 있고, 단구의 표면은 조각조각 갈라져 있다. 반대편 절벽에도 새겨진 셀 수 없이 갈라진 침식의 흔적에 장엄함이 느껴진다. 바위와 절벽 사이에는 시스택(Sea Stack·침식에 의해 육지로부터 분리된 수직 기둥 모양의 암석)까지 솟아 있다. 이 인근에 절벽 사이로 통하는 협곡이 있는데, 이 협곡은 둘레길과 계단으로 이어져 있다. 협곡 앞 파식대도 어느 한 부분이 다른 곳과 같은 곳이 없을 정도로 종잡을 수 없이 침식돼 있다.
바다가 만들 수 있는 온갖 자연경관이 오직 한 해변을 위해 모인 것과 같은 절경이다. 기암괴석의 전시장이라 할 수 있다. 거친 암석이 가득한 해변이라 여름 물놀이에는 적합하지 않고, 파식대와 갯바위에 친 파도가 얼어 함부로 오르기 어려운 겨울보다 봄이 이곳을 눈에 담기 좋은 시기다.
'보글보글' 몽돌의 메아리
강원 동해시 한섬해변 인근의 몽돌해변에 들이친 파도가 후퇴하고 있다. |
고불개해변을 지나면 한섬의 작은 항구인 천곡항에 이른다.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크기의 해안 동굴이 있는 절벽의 뱃머리 전망대에서 잠시 쉬어갈 수 있다. 한섬의 끝에 도달하기 직전, 일명 ‘얼굴바위’로 통하는 병풍 같은 해식애에 가려진 몽돌해변이 모습을 드러낸다. 거듭되는 침식에 절벽이 결국 무너지면, 절벽의 파편이 파도에 휩쓸려 서로를 갈고 닦는다. 충분한 세월이 흐르면 거친 절벽의 파편은 사라지고 둥글둥글한 몽돌이 남는다.
몽돌이 깔린 해변은 그 외형도 아름답지만, 진가는 소리에 있다. 파도가 몰아친 후 물이 빠질 때 몽돌 틈 사이로 ‘보글보글’하는 은은한 소리가 메아리친다. 몽돌이 서로 부딪히며 나는 소리, 파도에 의해 맺힌 기포가 터지는 소리, 물살이 좁은 몽돌 틈새를 통과하며 울리는 소리가 서로 어우러진다. 바닷소리는 그 자체로도 심신에 안정을 주지만, 몽돌해변의 화음을 듣고 있자면 온갖 고민과 피로가 보글보글 씻겨나가는 기분이다.
강원 동해시 한섬해변의 에메랄드빛 모래사장에 잔잔한 파도가 밀려들고 있다. |
강원 동해시 한섬해변에서 낚시꾼들이 월척을 기다리고 있다. |
아름다운 한섬의 끝은 한섬해변. 고운 모래가 펼쳐진, 가장 해수욕에 적합한 백사장이다. 해수욕 철이 아닌 계절에는 조용히 산책이나 낚시를 즐기는 시민들이 찾는 작은 해변이다. 북쪽의 한섬과 남쪽의 감추산이 천연 방파제 역할을 해 잔잔한 파도가 에메랄드빛 해변에 밀려든다.
세월이 칠한 파스텔톤 문화재
강원 동해시 동부사택 독신자 합숙소 뒤로 간부 주택과 사택 단지가 보인다. |
강원 동해시 동부사택 합숙소 간부 주택 사이에 벚나무가 초록 잎을 맺고 있다. |
봄 바다 감상과 함께 동해시 묵호에는 봄기운을 즐길 수 있는 역사적 문화재도 있다. 과거 지역 산업시설이었던 건물들이 오래된 벚나무 등과 동화같이 어우러져 레트로 명소로 부상하고 있다.
한섬해변 남단으로부터 직선거리 1.2km, 도로 길이 2.4km 떨어진 보림산 자락에는 바랜 듯한 파스텔톤의 지붕이 있는 단층의 건물들이 나란히 진열돼 있다. 강원 지역의 무연탄과 흑연 등으로 질소를 생산했던 삼척개발의 사택과 합숙소로 사용됐던 '동부사택'이다.
1937년 넓은 정원이 딸린 공장장 공관이 먼저 지어졌고, 2년 후인 1939년 독신자 합숙소로 사용된 건물 4동이 완공됐다. 1944년 주택 두 동이 추가됐다. 해방 전에 지어진 건물들은 일제강점하 산업발전 과정 중의 노동자들의 집합 거주형태를 잘 보여주는 문화재로 인정받아 2010년 국가등록문화유산에 등재됐다.
강원 동해시 동부사택을 하늘에서 내려다본 모습. |
한 방에 5~7명이 살았던 합숙소와 입주 가사도우미를 위한 방까지 설계된 간부 주택의 대비가 당시 시대상을 보여준다. 서양식 지붕, 한식 기와, 일본식 다다미 바닥이 혼재된 독특한 건축 양식도 특징적이다. 다다미방은 그간 온돌로 바뀌었다. 4동 아래 27개 동의 사택이 추가되며 현재의 단지가 완성됐다.
한때는 삭막한 공장 사택 단지였을 이곳은 세월의 풍파에 빛을 바래, 오히려 감성적인 관광지로 탈바꿈했다. 회백색 벽채 위 얹힌 연노랑과 연파랑 지붕의 집과 우람한 벚나무는 동화 속 한 장면 같다. 벚꽃잎이 하나둘씩 떨어져 흩날릴 때즈음 방문을 강력히 추천한다.
강원 동해시 동해 구 상수시설 기계실 앞에 벚나무가 있다. |
강원 동해시 동해 구 상수시설 기계실 내에 장비들이 남아 있다. |
동해시 묵호동 레트로 관광 명소는 또 있다. 인근 공장으로 원료를 실어 나르던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한 급수시설인 '동해 구 상수시설'이다. 1960~1970년대를 거치며 일반 상수용 시설로 바뀌었지만 현재까지도 최초 건립 시기인 1940년의 설비가 그대로 남아 있다. 착수정, 침전지, 기계실 및 여과지, 염소투입실, 정수지, 배수지 등 6개 설비가 2004년 등록문화재에 등재됐다.
외부에 노출된 정수지와 기계실 외관, 침전지 등은 육안으로 볼 수 있지만 내부로 들어갈 수는 없다. 기계실 내부도 창문을 통해 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내부보다는 주변 공원과 함께 지역의 문화·휴식공간으로 유명하다. 침전지와 기계실 앞 벚나무가 자라는 잔디밭 일대가 아름답다.
강원 동해시 묵호등대와 논골담길 일대의 모습. |
강원 동해시 묵호등대와 논골담길 일대의 모습. |
숨은 바다와 지역 명소를 충분히 즐겼다면 동해 여행의 마무리는 묵호항 인근에서 하면 좋다. 묵호항 여객터미널과 묵호역 사이 중앙시장과 묵호등대·논골담길 일대에는 수공예품과 소품을 전시·판매하는 소품숍이 곳곳에 숨어 있다. 바다를 주제로 한 액세서리와 귀여운 캐릭터가 있는 생활소품 등이 여행의 추억을 더한다.
항만에 바로 붙어 있는 작은 어판장에서는 매일 갓 정박한 어선에서 내린 활어와 갑각류를 맛볼 수 있다. 자연산 수산물을 주로 취급해 매일 들어오는 어종과 물량이 다를 수 있지만 내륙까지 잘 유통되지 않는 어종 등을 저렴하게 즐길 수 있다.
동해=글·사진 이한호 기자 han@hankookilbo.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