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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뉴스와 혐오가 만든 1931년 중국인 습격 사건 [박찬승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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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31년 7월6일치로 경성, 인천 등지의 중국인 거리가 습격당한 모습을 보도하고 있다. 사진은 경성의 중국인 거리에 모여든 군중과 피신한 중국인의 모습이다.

동아일보 1931년 7월6일치로 경성, 인천 등지의 중국인 거리가 습격당한 모습을 보도하고 있다. 사진은 경성의 중국인 거리에 모여든 군중과 피신한 중국인의 모습이다.




박찬승 | 한양대 사학과 명예교수



12·3 내란사태가 발생한 이후, 난데없는 ‘중국인들에 의한 선거부정’이라는 가짜뉴스가 떠돌았다. 전혀 근거가 없는 허무맹랑한 설이었다. 그런데도 상당수의 사람이 이 설을 믿고 주위에 유포했으며, 이 과정에서 이들의 ‘혐중’ 의식이 상당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런 이들은 아직은 소수지만, 결코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역사가 그것을 말해준다.



1931년 7월3일 밤 인천의 조선인들은 군중을 이루어 시내에 있던 중국인 호떡집, 이발소, 음식점 등 10여곳을 습격했다. 이튿날 밤에도 수천명의 조선인 군중은 중국인 거리에 있던 중국인 가옥과 상점을 습격하였다. 그 결과 5일 새벽 1시까지 중국인 집 58호가 파괴되었다.



평양에서도 7월4일 밤 10시께부터 조선인들이 군중을 형성하여 신창리에 있던 중국요리점 동승루를 습격했다. 이튿날 저녁 8시께도 군중 수백명이 동승루를 다시 습격했으며, 이어서 종로통으로 가서 중국인 상점과 가옥을 습격했다. 이들은 밤 9시께 소석리와 기림리의 중국인 가옥에 불을 질러 40여호를 불태웠다. 이들은 6일 새벽 3시까지 방화와 습격을 계속했다. 6일 낮 1시 반 군중 5천명이 다시 평양 시내 중국인들의 집을 습격했다.



그 밖에도 경성, 원산, 사리원, 개성, 공주 등 중국인이 많이 사는 도시에서는 며칠 동안 중국인에 대한 습격이 계속되었다. 훗날 리턴 보고서에 따르면, 이 사건으로 인한 중국인 사망자는 127명이었고, 부상자는 393명에 이르렀으며, 재산 피해액은 250만원이었다고 한다. 사건 발생 직후 조선에 살던 중국인 10만명 가운데 약 1만명이 중국으로 피신하였다.



이 사건 관련자로 체포된 조선인은 7월13일까지 경기도에서 490명, 평안남도에서 750명, 기타 지방에서 600명 등 모두 1840명이나 되었다. 이 사건 공판이 종료된 1932년 9월까지 1천명에 가까운 조선인이 벌금형이나 징역형을 받았다.



이 사건은 과거에는 만주에서 있었던 만보산 지역의 한-중 농민 갈등 사건과 합하여 ‘만보산 사건’이라 알려졌지만, 최근에는 국내 사건을 중심으로 ‘배화(화교 배척) 사건’이나 ‘중국인 습격 사건’으로 불린다.



매일신보 1931년 7월5일치 호외로서, 경성과 인천에서 일어난 중국인 습격 사건을 보도하고 있다. 사진은 중국 영사관에 피신한 중국인들의 모습이다.

매일신보 1931년 7월5일치 호외로서, 경성과 인천에서 일어난 중국인 습격 사건을 보도하고 있다. 사진은 중국 영사관에 피신한 중국인들의 모습이다.


이 사건은 왜 일어난 것일까. 1931년 4월 만주 창춘 부근의 만보산이라는 지역에서 중국인 중개인 하오융더가 중국인 지주로부터 넓은 토지를 빌렸고, 이를 다시 조선인들에게 빌려주었다. 조선인들은 이 토지에 물을 끌어들여 논농사를 짓고자 했다. 이를 위해 이퉁강에서 물을 끌어들이는 수로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수로가 중국인 41명의 농지를 가로지르게 되었다. 이에 중국인들은 지방 당국에 항의하였고, 당국은 경찰을 현장에 파견하여 조선인들에게 당장 수로 개착을 중지하고, 불법으로 전대한 해당 토지에서도 퇴거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창춘 주재 일본 영사는 조선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영사관 경찰을 파견하였다. 중·일 양쪽은 협상을 개시했으나 결렬되었고, 조선인들은 영사관 경찰의 비호 아래 용수로 개착을 다시 하였다. 이에 7월1일 중국인 농민단체가 농기구 등을 들고 와 조선인들을 공사 현장에서 내쫓고 용수로를 막아버렸다. 7월2일에는 중국인 수백명이 다시 몰려와 조선인들이 만든 수로와 제방을 파괴하였다.



상황이 급박하게 전개되었지만, 중국인과 조선인 농민들이 물리적 충돌까지 간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조선일보 창춘지국장이었던 김이삼 기자는 중국인과 조선인 사이에 물리적 충돌이 발생했고, 그 결과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기사를 경성 본사에 전송했다. 그는 왜 이런 기사를 보냈을까. 일본영사관 쪽이 고의로 허위 정보를 제공했다는 설이 있으나 근거가 확실치는 않다. 조선일보 본사는 김이삼 기자가 보내온 기사를 그대로 믿고, 7월3일 호외와 4일 본보에서 “중국 관민 800여명과 동포 200여명이 충돌하여 조선 농민 다수가 살상되었으며, 이에 일본 군대가 출동 준비 중”이라고 보도했다. 과장된 가짜뉴스였다. 만주의 조선인 동포 가운데 희생자가 났다는 보도가 있자, 인천이나 평양, 경성의 조선인들은 ‘동포 의식’에서 흥분하여 앞서 본 것처럼 중국인들에게 보복을 했던 것이다. 여기에 더해 평양에서는 “평양의 중국인들이 조선인들을 학살했다”는 유언비어까지 떠돌았다고 한다.



조선일보 1931년 7월7일치로 평양에서의 유혈 참사과 중국인 상가 습격에 대해 보도하고 있다. 사진은 평양의 중국인 상점들이 습격당한 모습이다.

조선일보 1931년 7월7일치로 평양에서의 유혈 참사과 중국인 상가 습격에 대해 보도하고 있다. 사진은 평양의 중국인 상점들이 습격당한 모습이다.


당시 중국인들을 습격한 이들은 주로 노동자, 농민, 상인들이었는데, 특히 노동자가 많았다. 노동자들은 1920년대 이후 중국인 노동자들이 조선에 대거 몰려와 값싼 임금으로 일자리를 빼앗기 시작하자 이들에 대해 경계심과 혐오감을 갖게 되었다. 또 경성·평양 등 도시 근교의 조선 농민들은 중국인들이 중국 노동자를 데리고 와서 농장을 경영하며 조선인들의 근교 농업을 위협하자 역시 위기감과 혐오감을 가졌다. 또 중국 상인들은 일찍부터 인천 등 개항장이나 서울, 평양 등 도시에 자리 잡고 중국으로부터 비단, 삼베, 모시 등을 수입하여 판매하면서, 포목전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 상인들은 이들에게 경쟁의식과 혐오감을 가졌다. ‘혐오감’은 특정 대상을 싫어하거나 미워하는 감정이다. 당시 대중의 혐중 의식은 언론의 중국인에 대한 선정적인 보도로 조장된 측면도 있었다. 결국 가짜뉴스와 유언비어는 조선인들의 혐중 의식, 동포 의식 등을 자극하여 그들을 살인, 방화, 약탈, 파괴를 저지르는 과격한 군중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 사건 이후 만주와 중국 관내에 있던 조선인들은 난처한 처지에 놓였다. 다행히도 중국의 지도층은 중국인의 조선인에 대한 감정을 누그러뜨리면서, 이 사태의 책임을 일본 쪽에 돌리고 있었다. 중국 국민당 요인들은 만보산 사건이 만주에서 군사행동을 하기 위한 일본 쪽의 음모에서 나온 것으로 의심하였다. 조선에서도 언론과 사회단체들이 나서서 사태를 진정시키고 피해를 당한 중국인들을 도왔다. 사태는 그렇게 수습되어 갔다.



다시 현재로 돌아와 보자. 중국인에 대한 혐오와 가짜뉴스가 점점 확대되면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불상사가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대중에게 영향력이 큰 한·중 양국의 정치 지도자들이 상대에 대한 발언을 항상 신중히 해야 한다. 언론도 대중을 자극하는 과장된 뉴스, 가짜뉴스를 퍼뜨리는 일을 절대 경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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