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경북 영덕군 영덕읍 석리 따개비마을이 지난달 번진 산불로 여기저기 타 처참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
양창모 | 강원도의 왕진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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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도망갈 수 있을까?’ 방문진료 가서 마주한 유 할머니의 오(O)자형 무릎을 보면서 든 생각이다. 아마도 경북 지역의 산불이 진화되지 않던 3월의 어느 날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무릎관절에 주사를 놓으려는데 구석에 있던 할머니 휴대전화에서 갑자기 “띵동” 소리가 난다. “전국의 건조한 날씨와 강풍으로 작은 불씨가 위험한 불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 소각 행위와 입산을 자제해주시기 바랍니다.” 행정안전부에서 보낸 재난문자를 휴대전화가 음성으로 바꿔서 들려주고 있었다. 문자를 읽을 수 없는 할머니를 배려해서 가족이 설정해놓은 거였다. 깜짝 놀랄 만큼 큰 음량에도 할머니는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난청이 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들렸다고 한들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무릎 관절염으로 잘 걸을 수 없는 유 할머니에게, 노인성 망막질환으로 시야 장애가 있는 안 할머니에게, 심한 관절구축으로 침대에서 나오지 못하는 송 할머니에게, 무엇보다 차를 운전할 줄 모르는 대부분의 동네 할머니에게 유사시에 대피하라는 긴급재난문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왜 도망가지 않아?” 산불로 인한 사망자가 늘어났다는 뉴스를 보며 이런 반응을 보이는 이들이 주변에 꽤 있다. 아마도 답답하고 안타까워서 하는 말일 테지만 거기에는 노인들의 상황에 대한 무지도 들어 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이해하려 할 때 앎이 생긴다. 타인의 처지에 대한 앎이 생길 때 복지가 시작된다. 그러니 아픈 노인들의 삶 가까이 있는 나는 이렇게 답하고 싶다. “노인이 건강한 당신과 같다면 당연히 도망갈 수 있다. 잘 듣고 잘 보고 잘 걷고 차가 있다면 왜 피신을 안 하겠는가. 마찬가지로 당신이 그 노인들과 같다면 당신은 도망갈 수 없을 것이다. 재난문자를 들을 수 없고 방송을 볼 수 없고 잘 걸을 수 없고 차도 없다면 그 상황에서 어떻게 피신할 것인가.” 실제로 경북 지역의 산불 사망자 중 70.8%가 80대 이상 및 거동 불편자였다.(KBS 보도) 그러니까 ‘왜 도망가지 않아?’라는 말은 노인에게 ‘왜 귀가 안 들려?, 왜 보질 못해?, 왜 걷질 못해?, 왜 운전을 못 해?’라고 묻는 것과 같다.
한국처럼 재난이 일상화되고 있는 사회는 통합돌봄 안에 재난돌봄이 포함되어야 한다. 평온한 죽음은 평온한 삶으로 이어진다.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사람이 불길 속에 죽는 것은 살아남은 가족의 삶을 불길 속에 가두어둔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이 재난으로부터 도망갈 방법을 찾지 못해 집에서 죽는 비극이 더는 없어야 한다. 요양시설에 있는 노인을 구출하는 데 가장 중요한 사람은 가족이 아니다. 요양시설 근무자다. 통합돌봄이란, 아픈 노인을 시설로 보내는 대신 마지막까지 집에서 돌봄서비스를 받도록 하는 제도다. 집이 곧 요양시설인 셈이다. 그렇다면 집이라는 요양시설에 재난이 닥쳤을 때도 노인을 집에서 구출해 나오는 데 돌봄서비스 제공자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집으로 찾아가는 요양보호사는 노인의 구체적인 상황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노인의 집에 재난이 발생했을 때 요양보호사의 노인에 대한 정보가 신속히 소방당국과 행정에 취합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어야 한다.
방문진료 때 마주하는 마을의 얼굴은 여러가지 표정이다. 그 표정은 모두 관계의 얼굴을 닮아 있다. 어떤 마을은 치매 노인이 혼자 살아도 아무도 들여다보는 이가 없고, 어떤 마을은 죽과 먹을 것을 들고 노인을 자꾸만 찾아오는 이웃 때문에 진료를 ‘방해’받기도 한다. 재난이 우리에게 찾아올 때 그 재난의 얼굴도 마을의 얼굴을 닮았을 것이다. 재난이라는 특별한 상황에 대해 잘 대처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특별한 능력이 아니라 평범한 이웃들의 연결망이다. 일상에서 촘촘히 구축해놓은 그 관계가 재난에서도 빛을 발한다. 재난이라는 어둠을 밝히는 것은 재난 속 불빛이 아니라, 지금 여기 일상에서 우리가 밝히는 불빛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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