층고 14m 지하 전시장에 두개골 형상 100개가 천장 창문서부터 바닥으로 쏟아져 내리듯 쌓여 있다. 백색 두개골 하나당 무게 60㎏, 높이 1.2m에 달한다. /허윤희 기자 |
층고 14m 전시장이 백색의 지하 무덤이 됐다. 높이 1.2m의 두개골 형상 100개가 천장에서 바닥으로 무너져 내리듯 쌓여 있다. 호주 출신 조각가 론 뮤익(67)의 설치 작품 ‘매스(Mass)’다. 작가는 파리 카타콤(지하 묘지)을 방문했을 때 100년 넘는 세월동안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뼈와 그 뼈들이 무너져 내린 형태를 보고 영감을 받았다. 자연광이 들어오는 창문부터 바닥으로 쏟아져 내리는 백색 해골 무더기가 경탄과 공포를 동시에 자아낸다.
침대에 누운 여성을 과장되게 확대해 만든 대형 조각 ‘침대에서’(2005). 162 × 650 × 395cm.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 컬렉션. /뉴스1 |
‘인체 조각의 거장’ 론 뮤익의 아시아 첫 개인전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5, 6전시실에서 개막했다. 2005년부터 뮤익을 지원하는 프랑스 카르티에 현대미술재단과 공동 기획한 전시다. 뮤익은 장난감 제조업자인 부모 밑에서 자랐고, TV 아동극이나 영화, 광고에 쓰이는 사실적인 소품들을 제작하며 방송·광고계 주목을 받았다. 유리섬유와 실리콘을 이용해 실물과 똑같은 인형을 만들었던 과거의 경험과 기술을 응용해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조각을 만든다. 30년간 조각가로 활동했으나 평생 만든 작품이 48점뿐이다. 극도로 세밀하고 집중이 필요한 그의 작품은 한 점 완성하는데 수개월, 수년이 걸리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에선 시기별 주요 작품 10점을 모아 소개한다.
론 뮤익, '마스크 II'(2002). 작가의 얼굴을 실제보다 4배로 확대한 자소상이다. /국립현대미술관 |
입구에서 만나는 남성 얼굴은 실제보다 4배로 확대한 자소상이다. 론 뮤익이 자신의 43세 때 얼굴을 조각으로 만든 ‘마스크 II’. 깊은 잠에 빠진 남자의 얼굴은 피부, 모공, 머리카락, 눈썹, 수염, 핏줄, 잔주름까지 정교해 실제 사람이 누워있는 듯 착각을 일으킨다. 하지만 뒤에서 보면 텅 비어 있어 가면에 불과하다는 걸 알게 된다.
노인과 암탉이 테이블에서 팽팽하게 기싸움을 하고 있는 ‘치킨/맨’(2019).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 아트 갤러리 테 푸나 오 와이훼투 컬렉션. /뉴스1 |
'배에 탄 남자'(2002)가 전시된 모습. 팔을 모아 벗은 몸을 간신히 가린 남자가 보트의 뱃머리에 앉아 무언가를 의심하는 듯한 눈길을 보내고 있다. 159 × 138 × 429cm. 개인 소장. /연합뉴스 |
뮤익은 인체 조각을 극단적으로 확대하거나 축소해 만든다. 협력 큐레이터로 참여한 론 뮤익 스튜디오의 찰리 클라크는 “현실과 동떨어진 공간에 있다는 느낌을 관객에게 주기 위해서 작게 혹은 크게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침대에 누운 여성을 재현한 가로 6m 대형 조각 ‘침대에서’(2005), 노인과 암탉이 테이블에서 팽팽하게 기싸움을 하고 있는 ‘치킨/맨’(2019), 10대 연인을 표현한 ‘젊은 연인’(2013) 등이 나왔다.
론 뮤익의 조각 '쇼핑하는 여인'이 전시된 모습. 113 × 46 × 30cm. 타데우스 로팍 컬렉션. /뉴스1 |
작가는 “비록 표상을 만드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지만, 내가 포착하고 싶은 것은 삶의 깊이”라고 말한 바 있다. 양손에 묵직한 쇼핑 봉투를 든 채 외투 속에 아기를 품고 있는 ‘쇼핑하는 여인’(2013)은 현실에서 볼 법한 얼굴이다. 아기는 작은 손가락을 엄마 가슴에 얹고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지만, 피곤에 지친 엄마는 생각에 잠겨 다른 곳을 보고 있다. 김성희 국립현대미술관장은 “뮤익의 작품은 사람 같은 외형을 단순히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시대의 자화상을 마주하게 만든다”며 “현대인의 고통과 외로움, 불안감 같은 내면의 감정이 담겨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고 했다.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대형 해골이 수직으로 쌓인 ‘매스’. 뮤익은 이 작품이 전시될 때마다 공간에 따라 다르게 설치하도록 의도했는데, 이번 전시에선 층고가 14m에 이르는 지하 전시장이라는 데 포커스를 뒀다. 찰리 클라크 큐레이터는 “높은 천장에 난 작은 창문이 우리가 땅 밑에 있다는 걸 인식하게 한다”며 “작가가 두개골이 쏟아져 내리는 모습을 의도했다”고 했다.
홍이지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는 “매스 작품만 해도 크레이트 100개로 이뤄진 대규모 운송 작업이라 항공이 아닌 선박으로만 가능했고, 두 달에 걸쳐 운송했다”며 “6국의 다양한 기관과 개인 컬렉터에게 한 점씩 모아서 한자리에 모은 전시”라고 했다.
다큐멘터리 '스틸 라이프: 작업하는 론 뮤익'의 한 장면. 고티에 드블롱드 각본 및 감독, 2013, HD 영화, 48분. ⓒ 고티에 드블롱드./국립현대미술관 |
6전시실에선 작가의 작업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사진 연작 12점과 다큐멘터리 영상 2편을 볼 수 있다. 25년간 작품이 제작되고 설치되는 과정을 기록해 온 프랑스 사진작가이자 영화감독 고티에 드블롱드의 작품이다. 미술관은 “론 뮤익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오래 집중해야 작품을 완성할 수 있는지 단면을 볼 수 있는 영상이니 꼭 관람하시면 좋겠다”고 권했다. 전시는 7월 13일까지. 관람료 5000원. 내년 일본 도쿄 모리미술관에서도 전시를 선보일 예정이다.
☞론 뮤익(67)
1958년 호주 멜버른에서 태어났다. 소규모 장난감 제조업자 부모 밑에서 어린 시절 꼭두각시 인형과 다양한 생물 모형을 만들었다. 쇼윈도 디자이너로 일하다 TV 아동극 인형 제작자, 영화 특수효과 감독 등으로 활동했다. 1996년 화가 파울라 레고와 협업한 작품이 영국 런던 헤이워드 갤러리에서 선보이며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실제 사람보다 더 사람 같은 인체 조각을 만든다.
[허윤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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