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로 건너뛰기
뉴스
서울
맑음 / -3.9 °
한겨레 언론사 이미지

[안보윤 소설 | 소년 7의 고백] 1회

한겨레
원문보기

[한겨레] 안보윤 소설 <1화>

2010-08-18-18:31:09

……모르겠어요. 이젠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제가 그날, 거기 있었던 게 맞나요? 동네 애들이 빠짐없이 모두, 303동 옥상에 모여 있었어요? 제 손이…… 우리 발이 정말로 그렇게 움직였나요, 미주 누나를 우리가…… 형사님, 딱 한 번만 솔직하게 얘기해주세요. 이제 조서도 다 썼고 카메라도 껐잖아요. 그러니까 말해주세요, 우리가 정말, 구제불능의, 파렴치한 성폭행범이 맞는 건가요?

*

2010-08-17-21:08:54

3층까지 다 아저씨네가 쓰는 거예요? 경찰서라는 거 되게 크구나. 여기 문들도 다 방인가 봐요. 조사1실, 조사2실…… 우리 학교 과학실 복도도 이렇게 생겼는데. 복도에 실습실1, 실습실2, 팻말만 쫙 붙어 있어요. 근데 거기 실습실은 잠가놓고 아무도 안 써요. 과학 수업 시간에 화학 실험도 안 하고 해부도 안 하고 우린 맨날 비디오만 봐요. 선생님은 그냥 다, 외우면 된대요. 직접 안 해봐도 알려준 대로 외우기만 하면 백 점이라고. 근데요 아저씨, 나 여기 왜 온 거예요? 아저씨가 곰곰이 생각해보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오는 동안 열라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모르겠어요. 잘못한 것도 아무것도 없거든요, 백차도 처음 타봤고.

아, 잡아당기지 마요, 안 그래도 팔 저려 죽겠는데. 수갑은, 나 수갑은 왜 찼어요? 경찰서 올 때 원래 수갑 차고 오는 거예요? 한밤중에 아저씨들이 집으로 들이닥쳐서 막 팔 꺾고 벽에 얼굴 처박고 막, 그렇게 끌고 오는 거 맞아요? 이쪽 어깨 빠진 거 같아요, 얼굴도 화끈거리고. 내 턱 까졌어요? 피 나요? 아우 씨, 진짜 아픈데. 영화에서나 그렇게 하는 줄 알았는데 졸라 리얼하데요. 동영상 찍어서 인터넷에 올렸음 대박이었을 텐데 아깝다. 테러범 진압하는 동영상 본 적 있는데, 뭐였더라 무슨 은행인가 쇼핑몰인가에서 몸에 폭탄 두르고 나대는 복면 때려잡는 장면이 딱 그랬어요. 나는 뭐 폭탄은커녕 빤스만 입고 있었는데 졸라 억울하게 처맞고. 아저씨, 근데 이거 누구 옷이에요? 냄새나요. 여기로 들어가요? 아 씨, 여기도 냄새나네. 페브리즈 같은 거 없어요? 냄새 싹싹 뭐 그런. ……아저씨 졸라 과묵하시네요. 난 씨발, 불안해 미치겠는데.

우리 할머니 불러주세요. 밖에 없어요? 아까 막 소리 지르면서 따라오는 거 같았는데. 우리 할머니 목소린 딱 들으면 알아요, 벙어리라서 식도발성인가 뭐 그런 거 하거든요. 담배를 하도 피워서 목 어디를 잘라냈다는데 목소리 완전 깨요. 백 명이 동시에 트림하는 소리랑 똑같아요. 승호는 물개가 껑껑 대는 소리라던데, 병신, 지가 물개를 언제 봤다고. 암튼 우리 할머니 불러줘요. 아직 집에 있음 전화라도 해주세요, 내 옷 좀 갖다 달라고. 이거 냄새나서 못 입겠어요, 디자인도 졸라 구리고. 아 진짜, 여긴 뭐 꼴랑 책상 하나랑 의자밖에 없는데 냄새가 이렇게 난대요, 누가 똥 쌌나.

……몰라요. 여기 왜 왔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요. 그래서 아까부터 물어봤잖아요, 왜 잡혀 왔느냐고. 아저씨가 졸라 씹었지만.

……이상하네. 암만해도 이건 아닌 거 같은데. 있잖아요, 저번에 경훈이 형이 오토바이 쌔비다 걸렸을 땐 안 이랬거든요. 그 형은 진짜 나쁜 짓 한 건데도 형사 아저씨들이 팔만 잡고 갔거든요, 정강이 까고 수갑 채워서 막 개새끼처럼 질질 끌고 가진 않았거든요. 생각할수록 억울하네 씨발.


아, 됐어요. 뭐요. 욕 안 했어요. 아파서 그래요, 어깨도 아프고 얼굴도 아프고 손목도 아프고. 다 왔는데 수갑 왜 안 풀어줘요? 조사실 들어왔잖아요. 어, 이 방 팻말은 빈 딱지네. 취조? 취조준비실? 그게 뭔데요? ……뭔 소린지 모르겠어요. 됐고, 일단 수갑부터 풀어줘요. 기분 졸라 더러워요. ……내가 뭘 어쨌길래요? 뭐라뇨, 아저씨가 방금 그랬잖아요, 여긴 죄지은 놈들 빨가벗기는 데라고. 죄지은 것도 없는데 그럼 난 왜 데려왔어요? 뭘 발뺌을 해요, 암것도 한 게 없다니까.

안보윤

1981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명지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2005년 《악어떼가 나왔다》로 제10회 문학동네작가상을 수상하며 등단했고, 2009년 《오즈의 닥터》로 제1회 자음과모음문학상을 수상했다. 그 밖에 장편소설 《사소한 문제들》, 《우선 멈춤》, 《모르는 척》을 펴냈다.




공식 SNS [통하니] [트위터] [미투데이] | 구독신청 [한겨레신문] [한겨레21]


Copyrights ⓒ 한겨레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한겨레는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info icon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AI 이슈 트렌드

실시간
  1. 1한병도 이재명 정부
    한병도 이재명 정부
  2. 2강선우 1억 의혹
    강선우 1억 의혹
  3. 3정건주 미우새 합류
    정건주 미우새 합류
  4. 4장우진 린스둥 결승
    장우진 린스둥 결승
  5. 5그린란드 군 배치
    그린란드 군 배치

한겨레 하이라이트

파워링크

광고
링크등록

당신만의 뉴스 Pick

쇼핑 핫아이템

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