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올해부터 금융권에 '책무구조도'가 도입되면서 업계의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다. 책무구조도는 금융사 임원 각자가 내부통제 대상 업무의 범위와 내용을 스스로 명확히 설정하는 제도다. 정부는 반복되는 금융사고에 대응해 사전 예방 차원에서 이 제도를 마련했지만, 현장에서는 강화된 책임 부담과 징계 우려로 불안감을 호소하고 있다. 작은 실수 하나로 자리에서 물러나야 할 수 있다는 두려움도 크다. 이번 기획에서는 책무구조도의 도입 배경과 현황을 짚고, 제도가 보다 효율적이고 합리적으로 정착하기 위한 개선 방향을 모색해본다.
책무구조도는 우리나라보다 영국과 호주, 싱가포르 등 일부 선진국에서 먼저 도입된 제도다. 한국도 이들 사례를 많이 참고해 제도를 도입했다. 다만 외국의 경우 한국과 달리 대형 금융사와 중소형 금융사에 부담시키는 책무를 달리해 작은 회사들의 부담을 덜어줬다. 한국도 제도가 안착하면 이 같은 사례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는 조언이 나온다.
영국이 가장 먼저 책무구조도 도입, 한국도 참고
8일 금융권과 보험연구원 등에 따르면 전세계에서 가장 먼저 책무구조도를 도입한 국가는 영국이다. 영국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2012년 리보(LIBOR)금리 조작사건 등 대형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금융회사 내부통제 강화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영국 금융감독청(FCA)은 몇 년의 준비과정을 거쳐 금융회사 고위 임직원에게 보다 높은 책임성을 부여하는 고위관리자 인증제도(SM&CR)를 2016년 처음으로 도입했다. 대형 은행을 중심으로 처음 제도가 도입됐고 현재는 전 금융권으로 확대됐다.
SM&CR에 따라 영국 금융회사 고위관리자들은 선임 전 적격성을 갖추고 사전 승인을 받아야 한다. 책임영역을 명확히 하기 위해 금융회사는 각 고위관리자에게 책임을 분배하고 이를 책임진술서 등 문서로 작성해 금융감독당국에 공유해야 한다. 우리 정부도 영국의 이런 부분을 참고해 책무구조도를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싱가포르의 개인책임성제도는 2021년부터 싱가포르 통화감독청의 가이드라인에 따라 시행되고 있다. 싱가포르는 이른바 '결과에 바탕을 둔 접근방식'을 취해 금융회사들이 성취해야 할 5가지 결과를 제시했다. 예컨대 결과 1의 세부지침은 대상 임원의 범위(핵심기능)를 예시하고 판별 기준 등을 제시하며, 결과 3의 세부지침에는 고위관리자의 역할과 책임 및 금융회사의 전반적인 경영구조를 문서화하고 중대한 변경 시 적시 반영하도록 하는 등의 내용이 규정됐다.
한국은 모든 금융회사에 동일 규제 적용, 유연하게 바꿔야 한다는 주장도
우리나라는 작년에 책무구조도를 도입해 현재 금융사 규모별로 나눠서 단계적으로 시행 중이다. 다른 나라와 다른 점은 우리는 모든 금융회사를 적용 대상으로 하고, 세부 규제에 관해서도 금융회사의 자산이나 임직원 수 등 규모에 따라 차등적 규제를 적용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반면 영국은 회사의 자산규모 및 회사 유형별로 규제를 달리 적용한다. 예컨대 자산규모가 작은 보험회사에는 책임지도 마련·제출 의무가 적용되지 않고 대상 임원 범위도 제한적이다. 싱가포르도 5가지 결과의 성취는 회사 규모와 무관하게 모두 적용되지만, 직원이 50명 이상인 금융회사는 원칙적으로 가이드라인의 세부 지침까지 따라야 하지만 50명 미만인 소규모 금융회사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고 명시해 유연한 적용을 허용했다.
우리나라도 영국이나 싱가포르처럼 규모별로 규제를 유연화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온다. 규모가 작은 금융사의 경우 인력이나 자금 부족으로 대형 금융사처럼 내부통제 시스템을 제대로 마련하기 힘든 경우가 있는데 같은 규제를 적용하는 것이 형평성 면에서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양승현 보험연구원 연구위원은 "책무구조도를 차등 적용하지 않는다면 불균등한 규제 부담과 과도한 비용으로 규모가 작은 금융회사의 운영이나 시장 진입에 악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다"며 "제도가 안착하는 과정에서 차등적 규제방안이 활발하게 논의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창환 기자 goldfis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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