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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 꿈 접고 연 책방… “돈벌이 아니라 책으로 사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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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이런 서점] [11] 부산 광안리 주책공사
조선일보

2025년 3월 27일 오전 부산 수영구에 위치한 서점 '주책공사'의 이성갑 대표가 포즈를 취했다./김동환 기자


이처럼 자기 존재를 웅변하는 서점도 드물 것이다. 지난달 24일 부산 광안리 해수욕장 인근 민락동 골목. 베이지색 담장 한쪽엔 커다랗게 ‘책’이라는 글자가 검정 글씨로 적혀 있고, 다른 한쪽엔 흰 바탕에 검정 글씨로 ‘서점입니다’라고 쓴 간판이 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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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27일 오전 부산 수영구에 위치한 서점 '주책공사'의 모습./김동환 기자


단층 양옥을 개조한 이 서점 이름은 ‘주책공사’. 2020년 문을 연 6년 차 독립 서점이다. 보통 서점은 명당 자리인 중앙 매대에 신간이나 베스트셀러 등 판매가 좋은 책을 눈에 잘 띄도록 ‘뉘어’ 놓고, 벽면 책장엔 구간 등 판매가 시들한 책을 ‘세워’ 놓는다. 출판 관계자들이 ‘책이 서 있는 것이 곧 책의 죽음’이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렇지만 주책공사에선 다르다. 27평(약 89㎡) 공간에 보유한 책은 약 1만 권, 그중 독립출판물은 200~300권에 불과하지만 중앙 8개 매대에 누워 있는 건 모두 교보·예스24 등 대형 서점엔 입고되지 않는 독립 출판물이다. 신간·베스트셀러는 책장에 서 있다. 서점 웹사이트에서도 독립 출판물 위주로 판매한다. “독립 출판물 저자는 유독 2030 청년이 많습니다. 부산은 전국에서 고령화가 가장 빨리 진행되고 청년 인구 유출이 많아 ‘노인과 바다’라 불립니다. 청년들의 발길을 책으로 돌리기 위해 독립 출판물 입고 제안은 가리지 않고 다 받고 있어요. 일반 장서는 제가 읽고 좋았던 책만 입고하지만 독립 출판물은 선입견을 갖지 않기 위해 내용을 미리 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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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27일 오전 부산 수영구에 위치한 서점 '주책공사'의 이성갑 대표가 독립출판물 작가들이 써놓은 감사 쪽지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김동환 기자


서점 입구에 독립 출판물 저자들이 이성갑(42) 대표에게 쓴 감사 쪽지가 빼곡히 붙어 있었다. 모든 독립 출판물에 손님들이 살펴볼 수 있는 샘플 북이 있고, 저자가 직접 쓴 책 소개를 붙여 놓았다. ‘완벽한 퇴사를 꿈꾸는 당신을 위한 퇴사 가이드북’ ‘안녕하세요, 청년 구직자입니다’ ‘멋진 어른이 되고 싶어: 명언으로 쓰는 50일 완성 다이어리북’…. 일반 출판물에 비해 취직과 퇴사라는 주제 비율이 유독 높다. 이는 부경대·경성대 학생들의 자취 지역이라 1인 가구 비율이 40%가 넘는 수영구 주민들의 관심사와도 맞물린다.

처음 상업지구인 중구 중앙동에서 서점 문을 열었던 이성갑 대표가 2023년 민락동으로 옮겨온 가장 큰 이유가 청년들이었다. 서점 주 고객은 40~50대가 많지만, 주책공사의 경우 20대가 60~70%를 차지한다. “독립 출판물 판매는 서점 매출의 10% 남짓밖에 안 돼요. 그렇지만 경제적 가치를 따지기보다는 청년들에게 ‘나와 비슷한 청년이 글을 쓰는구나’라는 의미를 안기고 책에 대한 심리적 문턱을 낮춰 소비할 기회를 주기 위해 독립 출판물 중심으로 매대를 운영하고 있어요. 우리 서점에서 책에 대한 재미를 느낀 청년들이 10~20년 후에도 책을 계속 들고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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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매대에 독립 출판물을 놓고 일반 장서는 책장에 꽂은 서점 내부. /곽아람 기자


관광지인 광안리 특성상 주말에는 200~300명, 평일엔 50명 정도 손님이 든다. 이 중 80~90%가 책을 산다. 월간 판매량은 1500~3000권 사이. 특히 인기가 있는 건 이 대표가 기획한 ‘생일책 서비스’다. ‘책의 생일’인 초판 발행일이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인 책들을 모두 구비해 책 제목을 숨긴 블라인드북으로 포장해 판매한다. “자신과 같은 날 태어난 책을 읽거나, 친구와 생일이 같은 책을 선물하는 일이 의미가 있잖아요. 청년들이 사유하기에 좋을 법한 책들을 골라 초판 발행일별로 모으는 작업이 쉽지 않아 큐레이션에만 4년 걸렸습니다. 입소문이 나서 많이 팔릴 땐 한 달에 1000권도 팔립니다.”

이 대표의 원래 꿈은 목사였다. 대학 졸업후 목회 활동을 하다 서른두 살 때 ‘내 길이 아니다’ 싶어 그만뒀다. 이후 피자 전문점에서 일하다 서점을 차렸다. ‘주책공사’라는 이름에는 ‘책이 살고 있는 곳’ ‘주님 안에서 책으로 사역한다’는 다층적 의미가 있다. 이 대표가 인터뷰 중 가장 많이 한 말은 “돈을 벌려고 서점을 하는 건 아닙니다”였다. 그의 카카오톡 프로필엔 이런 문장이 적혀 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복음 10장 8절).”

주책공사의 PICK!

주책공사가 권하는 독립 출판물 3

1. 정현지 에세이 ‘엄마, 은경’: 익숙함에 무심히 지나쳤던 순간들, 그 속에 담긴 엄마의 모습을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엄마와 함께한 순간을 기억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위안과 공감을 준다.

2. 진수빈 에세이 ‘계절을 기다리는 마음’ : 낮고 작은 것에 눈길을 두고 사소한 것을 사랑하며, 덜 서글픈 삶을 위해 글을 쓰면서 무엇이 되든 평생 쓰는 삶을 꿈꾸는 작가가 곧 희망이 된다. 어떻게든 삶은 살아지므로 주어진 삶을 마주하고 기다리는 작가의 태도를 본받고 싶어진다.

3. 장혜영 에세이 ‘밤의 기차’: 11년 차 프리랜서로서 겪는 불안정과 고민, 도시에서 혼자 살며 느끼는 쌉싸름한 고독, 혼자이고 싶지만 결국 옆자리를 비워둔 채 사랑하는 사람들을 기다리는 마음을 담았다. 기차처럼 인생의 한 지점과 또 다른 지점을 오가는 여정 속, 남겨진 것들을 기록했다.

[부산=곽아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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