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제원 전 국민의힘 의원(왼쪽)과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한겨레 자료사진, 충남도청 제공 |
9년2개월과 7년1개월. 피해 구제를 받기 어려운 ‘권력형 성폭력’ 현실을 보여주는 상징적 세월들이다. 고 장제원 전 국민의힘 의원이 부산의 한 대학 부총장이었던 2015년 11월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 ㄱ씨는, 2025년 1월 경찰에 장 전 의원을 준강간치상 혐의로 고소했다. 2018년 3월 언론 인터뷰로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성폭력을 공론화한 피해자 김지은씨는, 2025년 4월에야 법정 싸움을 마무리했다. 안 전 지사 쪽은 2019년 형사 재판에서 유죄가 확정됐음에도 김씨가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재판에서 성폭력을 부인하며 ‘피해자 괴롭히기’를 이어갔다. 장 전 의원 피해자가 숨죽인 시간은 김지은씨가 2차 가해에 시달린 시간과 겹친다.
“안희정 사건 이후 발생한 (권력형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가 그렇게 심각하지 않았다면, 적어도 재판 결과가 나온 뒤 가해자를 옹호한 많은 정치인이 온전히 피해자에게 사과하는 선례를 남겼다면 장제원 사건 피해자가 고소를 결심하기까지 10년 가까이 걸리지 않았을 수도 있다.” 안 전 지사 수행비서 등으로 일한 옛 측근이면서 김지은씨를 조력한 문상철(42)씨가 최근 에스엔에스(SNS)에 올린 글의 일부다. 그는 안 전 지사가 어떻게 권력형 성폭력을 저지르게 됐는지, 피해자를 향한 2차 가해가 극심했던 배경은 무엇인지 등을 정치권 문화, 조직 구조 측면에서 살핀 책 ‘몰락의 시간’을 2023년 출간하기도 했다. 2018년 3월 정치권 첫 ‘미투’(나도 고발한다)였던 안 전 지사 사건부터 장 전 의원 사건에 이르기까지, 권력형 성폭력 문제를 꾸준히 지켜봐 온 문씨와 6일 전화로 인터뷰했다.
그는 가해자가 유력 정치인일수록 “가해자 말 한마디에 피해자의 생계, 평판, 커리어 전체가 무너질 수 있는 상황”이기에 “피해자가 고소를 결심하는 일 자체가 매우 어렵다”고 설명했다. 고소를 결심한 뒤에도 주변에서 이를 말리는 회유와 협박이 잇따르고, 고발 뒤에는 가해자가 속한 정치 세력과 지지층으로부터 “배신자, 문제 인물, 정치적 의도가 있는 사람”이란 공격에 시달리기 십상이다. 문씨는 “2018년 김어준씨가 ‘미투’ 운동이 (보수 세력의) 정치 공작으로 이용될 수 있다는 식으로 몰아간 것처럼 2025년에는 김기흥 국민의힘 대변인이 장 전 의원 피해자가 (문재인 정부 시절엔 하지 않았던) 고소를 한 데 대한 정치적 의도를 의심했다”며 “정치권이 피해자의 용기를 왜곡하고 본질을 흐린다는 점에서 장제원 사건과 안희정 사건 등 정치권에서 발생한 권력형 성폭력은 닮았다”고 짚었다. 윤석열 정부와 국민의힘은 박원순 전 서울시장 사건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지만 장 전 의원 사건과 관련해선 논평 하나 내놓지 않았다.
문씨는 “정치권이 (권력형 성폭력 사건에 대해) 온전히 반성했다면,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섰다면 비슷한 사건을 마주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라며 성찰을 촉구했다. 특히 “사과하지 않는 가해자와 (피해자를 공격하는) 2차 가해에 가담했던 자들에 대한 단죄”가 필요하다고 했다. 안 전 지사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피해자를 성폭력한 혐의로 2019년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됐다. 그러나 가해자의 편에 섰던 이들 가운데 지금까지 김지은씨에게 제대로 사과한 사람은 없다.
안 전 지사 측근인 어아무개 전 수행비서는 김지은씨에 대한 명예훼손 및 모욕 혐의로 2020년 벌금 200만원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이에 대해 김씨가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법원이 사과 문구를 게시하고 일부 금액을 배상하는 내용의 강제조정 결정을 내리자 그제서야 사과문이 에스엔에스에 올라왔다. 2022년 대선 당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티브이(TV)토론에서 민주당 광역단체장들의 권력형 성범죄 및 2차 가해자들을 공천한 데 대해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하지만 심상정 당시 정의당 후보가 ‘이재명 후보 선거대책위원회에서 일하는 (안희정 사건) 2차 가해자에 대해 조처했느냐’고 물은 데 대해선 명확한 답변을 피했다.
문상철씨가 2023년 12월5일 ‘한겨레21’과 인터뷰하는 모습. 류우종 기자 |
안 전 지사의 성폭력을 세상에 알린 피해자와 조력자들은 정치권에 발 디디기 어려운 상황이 된 반면, 가해자를 옹호하고 피해를 방관한 이들은 공천을 받거나 당에서 주요 직책을 맡아 활동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피해자 옆에 서면 불이익을 받고 가해자와 함께 하거나 피해자를 공격했던 사람들은 우리가 끝까지 챙기겠다는 식의 메시지가 지속되면 비슷한 사건을 계속 발생할 수밖에 없다”며 “2차 가해에 가담한 사람에 대해선 그에 합당한 책임을 지는 과정도 공개적으로 보여줘야 하는 게 아닌가”라고 되물었다. “(2차 가해자들이) 최소한 한 마디 사과라든지 반성, 피해자에게 ‘미안하다’는 이야기 정도는 공식적으로 해야 하는데 스리슬쩍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정치 활동을 하며 인권이나 여성 안전에 대해 이야기하는 행위 자체가 또 다른 피해자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메시지가 될 수 있죠.”
윤석열 대통령 파면이 결정된 지난 4일은 김지은씨가 안 전 지사와 충남도 등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이 “안 전 지사와 충남도가 8300여만원을 배상하라”는 판결로 확정된 날이기도 하다. 이날 문씨는 에스엔에스에 “민주주의의 봄날, 피해자의 삶에도 봄이 오길 기도한다”고 썼다. 그는 한겨레에도 권력형 성폭력 피해자들과 조력자들에게 연대 메시지를 전했다. “권력형 성폭력 피해를 드러낸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고, 저는 그 말하기를 시작하셨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존경해요. 말하기에 동참하는 분들이 늘어나기에, 더디긴 하지만 조금씩 나아지고 있고, 그래서 2018년과 2025년은 분명 다르다고 생각해요. 피해자와 조력자의 목소리가 결국은 사회를 바꾸는 출발점이 된다는 걸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범죄를 가한 사람들의 잘못이니까 자책하거나 혼자라고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김효실 기자 tran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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