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보다 광범위한 관세전쟁의 포성에 세계 금융시장이 크게 출렁였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무역 적자를 해소하기 전까진 협상하지 않을 것”이라며 자산 폭락세에 기름을 부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6일(현지 시간) 에어포스원에서 기자들과 만나 무역 적자가 해결되기 전까지 중국과 협상하지 않겠다고 했다./연합뉴스 |
미 행정부의 관세 정책은 가장 먼저 자국 경제와 시장을 때릴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 투자은행 JP모건은 “관세의 무게에 짓눌려 올해 미국 경제가 후퇴할 것”이라며 올해 미국의 연간 실질 GDP 성장률 전망을 기존 1.3%에서 마이너스(-) 0.3%로 하향 조정했다. 미 투자은행이 일제히 올해 성장률을 하향 조정했고,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국제통화기금(IMF) 총재 역시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정책은 세계 경제 성장이 둔화하는 시기에 중대한 위험을 제시했다”라고 경고했다.
미 경제 위축에 대한 공포는 투자자산에 대한 패닉 셀로 이어졌다. 지난 3~4일 이틀 동안에만 10% 폭락한 미국 증시는 7일에도 추가 조정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미 행정부가 공격적인 관세 정책을 유지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하면서 스탠더드앤드푸머스(S&P)500·나스닥100·다우 선물이 각각 4% 안팎 하락하고 있다.
미 월가의 공포지수로 불리는 시카고옵션거래소(Cboe) 변동성 지수(VIX)는 45를 넘었다. 코로나 팬데믹이 한창이던 2020년 4월을 제외하곤 지난 30여년간 도달한 적 없는 수치다.
아시아 증시도 직격탄을 맞았다. 7일 코스피 지수는 5.5% 폭락했다. 장 초반 코스피200 선물 가격이 급락하면서 프로그램매매의 호가 효력을 5분간 정지시키는 매도 사이드카가 발동되기도 했다. 일본 닛케이평균과 중국 상하이종합지수도 6~7% 폭락하고 있고, 홍콩 H지수도 10% 넘게 밀렸다.
미국 주요 지수가 일제히 폭락한 지난 4일 뉴욕증권거래소 모습./연합뉴스 |
전통적으로 안전 자산으로 꼽히는 금 가치도 떨어졌다. 차입 투자자가 마진콜(추가 증거금 요구) 상황에 직면해 현금을 확보하기 위해 안전자산인 금을 매도한 결과라는 분석이 나왔다. 구리 가격도 폭락했다.
달러는 혼조세다. 주요 6개 통화 대비 달러 가치를 의미하는 달러 인덱스는 102 수준으로 하락했다. 올 초 110 가까이 올랐던 것과 비교하면 달러 약세가 이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지만, 3일 이후로 좁혀보면 오름세다. 공격적인 관세 정책이 미국 경제를 둔화시키고 나아가 달러 패권국의 지위까지 흔들 수 있다는 우려가 있는 반면, 위기 국면에서는 달러를 사야 한다는 매수 세력이 부딪히고 있는 상황이다.
세계 경제가 위축될 것이라는 전망에 국제 유가 역시 코로나 사태 이후 최저 수준으로 주저앉았다. 뉴욕상업거래소에서 서부텍사스원유(WTI) 선물은 3~4일 연이틀 6~7% 하락했다.
이들 자산에서 빠져나온 돈은 미 국채로 쏠렸다. 미 10년 만기 국채 금리는 연 4% 아래로 하락(채권 가격 상승)해 트럼프 취임 이후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다.
◇ 美 정책 성과 지표는 증시 아닌 ‘국채 금리’
관세 전쟁에 따른 경기 침체 우려가 그동안 지속됐음에도 세계 금융시장이 발작 수준의 폭락세를 보이는 원인은 트럼프 행정부의 강경한 태도에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증시가 폭락한 상황에 대해 “어떤 자산도 하락하길 원치 않는다”면서도 “가끔은 문제를 해결하려면 약을 먹어야 한다”고 말했다. 자신이 미국 경제의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한 막대한 무역 적자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증시 폭락이라는 부작용 정도는 견뎌야 한다는 입장을 우회적으로 내비쳤다.
서울 중구 하나은행 본점 딜링룸./뉴스1 |
특히 투자자들은 트럼프가 최근의 글로벌 자금 흐름을 의도했다는 게 더 명확해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트럼프 2기 행정부는 국채 금리를 경제 정책 성과 지표로 삼고 있는데, 그의 의도대로 미 국채 금리가 하락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3월 의회 연설에서 “금리가 크고 아름답게 떨어졌다”며 “이제야 맞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했었다. 국채 금리가 떨어지면 미 연방 정부가 부담해야 하는 이자 부담도 줄어든다.
달러 약세도 마찬가지다. 달러 가치가 떨어질수록 미국 제품의 수출 가격 경쟁력이 높아진다. 이는 곧 무역 적자를 줄이고 미국 제조업 부흥으로 이어질 수 있다.
공격적인 관세가 미 국내 물가를 자극해 고용과 투자를 위축시켜 먼저 미 경제에 타격을 줄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경고가 나오고 있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성과 지표로 삼고 있는 국채 금리가 하락하면서 정책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고 평가할 가능성이 크다.
윤여삼 메리츠증권 연구원은 “협상의 여지가 남아있다고 하지만, 관세 부과는 미국 경기 침체의 우려를 드리우고 있다”며 “미 국채 금리가 추가로 하락할 여지가 있다”고 말했다.
연선옥 기자(actor@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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