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예언자'/판씨네마 |
영화 ‘예언자‘의 주인공은 막 성년의 입구에 발을 들인 19살 말리크. 그가 감옥에서 자기도 몰랐던 자신을 찾아나가다 마침내 ‘예언자‘로 다시 태어나는 이야깁니다. 영화는 말리크가 프랑스 파리 교외의 교도소에 수감되면서 시작하는데요, 죄목을 정확하게는 안 알려주는데 경찰을 때렸다는 언급이 나옵니다. 6년형을 받았어요. 수감 절차를 밟는 말리크에게 교도관이 묻습니다. “돼지고기 먹냐?” 중요한 질문입니다. 말리크는 프랑스인이지만 혈통으론 아랍계이기 때문이죠. 이 질문에 대한 말리크의 답변. “아니요, 네.” 먹는다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즉, 우리의 주인공 말리크는 이 시점까지 어느 한쪽으로 정의된 정체성이 없었습니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이 점은 이후 그가 살아남는데 결정적인 힘이 됩니다.
여기 감옥은 여러 이민자가 갈등을 빚는 프랑스 사회의 축소판입니다. 크게는 아랍계와 코르시카계가 맞서고, 이집트 집시에 이탈리아 마피아까지 세력 충돌에 얽혀있습니다. 잠시만 방심해도 누군가의 면도칼에 목이 그어질수 있는 위험한 곳에서 말리크는 생존의 법칙을 배우게 됩니다. 우선 언어부터. 말리크는 코르시카계 두목 세자르의 눈에 띄어 심부름을 하게 되는데, 순전히 독학으로 코르시카어를 익혀요. 코르시카하면 떠오르는 인물 있으시죠. 나폴레옹. 코르시카어는 이탈리아어 비슷하다고 하는데, 나폴레옹 전기에 보면 초급 장교 때 코르시카어 억양 때문에 놀림받았다는 얘기가 나오거든요. 그만큼 표준 불어와 다른 언어인데도 감옥 들어갈 때 까막눈이었던 말리크는 귀동냥으로 이쪽 말까지 알아듣게 됩니다. 가방끈은 짧지만 눈치와 일머리가 아주 뛰어난 청년이라는 말씀. 그렇게 서서히, 어리버리 초보 수감자 말리크는 두목에게 조언까지 하는 내공을 쌓아가게 되죠.
영화 '예언자'/판씨네마 |
그렇다고 단순히 학습 능력만으로 말리크의 생존이 보장된 건 아닙니다. 앞서 말씀드린 “아니기도 하고 맞기도 하다”는 ‘정체성 아닌 정체성’이 중요합니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기에 어디에나 속할 수 있는 말리크는 대립하는 세력을 오가면서 협상과 조율을 능란하게 해냅니다. 이 과정을 영화에서 여러 일화를 통해 보여주는데 위기에 처할 때마다 튀어나오는 말리크의 대담무쌍한 면모를 보면 어느 정도 타고난 거 같아요.
말리크의 조력자이자 보스이자 일상의 위협이며 거꾸러뜨려야할 적인 세자르는 아무렇지 않게 탁자에 놓였던 숟가락이 어떻게 무시무시한 흉기가 되는지 보여주는 원단 깡패입니다. 그와 말리크의 관계는 일종의 유사 부자 관계인데 서구 문학에서 흔히 보이는 오이디푸스 설정으로도 볼 수 있겠고요. 말리크가 새로 태어나는 데 있어 아버지와 유사한 또 다른 존재는 말리크의 첫 살해 대상인 레예브입니다. 레예브는 말리크에게 공부를 권한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를 어쩔 수 없이 살해한 말리크. 이 영화가 청불인 이유 중 하나가 레예브 살해 장면 때문인데요, 이후로 레예브는 말리크 곁에 불쑥불쑥 나타납니다. 물론 상상이죠. 말리크가 후반부에서 중대한 결심을 할 때 천사의 계시를 받은 무함마드의 전설을 들려준 사람, 아니 유령도 레예브죠. 레예브를 말리브의 또 다른 자아로 본다면 일종의 자기 각성으로도 해석할 수 있겠네요.
영화 '예언자'/판씨네마 |
15년 만에 ‘예언자‘를 다시 보니 예전엔 모르고 지나갔던 부분이 보이기도 했는데요, 이를테면 신발이 그랬습니다. 처음 수감 절차를 밟을 때 교도관은 말리크의 헤진 운동화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립니다. 그러곤 수감자용 신발을 신으라고 해요. 신발이 곧 주인공의 정체성이 된 거죠. 요번에야 제 눈에 들어온 장면은 영화 후반부에 있습니다. 말리크가 거사를 치르기 전, 고급 상점이 늘어선 파리 거리를 지나다 어느 쇼윈도우를 눈여겨 보는데요, 그 쇼윈도우 너머로 고가의 구두가 언뜻 지나가거든요. 아, 이걸 그땐 못 봤구나. 이렇게 친절하게 알려줬는데. 중요한 대결을 앞두고 긴장감이 극도로 팽팽한 시퀀스에 일부러 스쳐가듯 넣어둔 해답을 이번에야 발견했습니다. 말리크가 거사 이후 어떤 사람이 될 지를 이렇게 바로 알려줬었군요.
아래 포스터에 나오는 말리크의 표정이 들어있는 후반부 장면은 다시 봐도 참 잘 찍었다 싶었습니다. 저 표정. 벌어지는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지만 이후 전개를 생각하면 이보다 들어맞을 수 없는 저 표정. 이런 장면 하나만 봐도 명작과 범작의 차이가 보이죠.
영화 '예언자'/판씨네마 |
사슴 얘기도 해볼까요. 영화 제목이 ‘예언자‘인데 이 단어는 말리크가 살해 위협을 받던 위기의 순간에 사슴 표지판을 보고 “짐승 나와요!”라고 외칠 때 나옵니다. 상대편이 “너 뭐하는 놈이야? 어떻게 알았어? 예언자야, 뭐야?”라고 말하죠. 말리크의 말대로 사슴이 도로로 튀어나왔으니까요. 이 장면 전에 말리크는 꿈인듯 생시인듯 사슴의 이미지를 보는데, 자기 암시와도 같은 몽환적인 영화적 장치입니다. 이날의 ‘예언’ 이후로 갱들 사이에서 ‘예언자‘로 통하게 된 말리크는 창살 너머로만 바라보던 바깥 세상에서 다시 태어나리라는 예언적 실현에 성큼 다가가게 됩니다.
영화 제목인 예언자가 영어로 ‘The Prophet’이 아니라 ‘A Prophet’이라는 점을 떠올려봐주세요. 앞의 표현은 예언자 무함마드에게나 쓸 수 있겠죠. 하지만 뒤의 표현은 스스로의 미래를 만들어간, 분명하고 확고한 자아 구현의 개척자 말리크에게도 가능하기에 나온 제목이 아닐까 싶네요. 그런 의미에선 스스로의 예언자가 될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고 볼 수 있는게 아닐까요. 이외에도 여러 해석이 가능한, 그러니까 명작인, 그러면서도 일단 재밌는 영화 ‘예언자‘를 영화관에서 만나보시기를 권해드리며, 저는 다음 레터에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신정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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