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곤 KBS 한국어진흥원 운영위원 |
◇ 단도리?
"서로 다른 의견을 하나로 모으는 것, 아이디어가 채택되지 않아 뿔이 난 사람도 내치거나 튀어 나가지 않도록 '단도리'하는 것, 계속 남아 동료를 돕도록 하는 것, 그래서 생각도 입장도 다른 모두가 계속 '우리'로 일하게 하는 것, 이 모두가 커뮤니케이션이다."
인용부호 속에 있으니 면피한 셈인가? 이런 건 아주 불가피한 상황에서만 가능하다. 가령 "내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같은 영화의 대사, 다른 사람이 말한 것, 그리고 말글의 무게가 상대적으로 가벼운 경우 등에 제한적으로 써야 한다.
단도리는 'だんどり', '段取(り)'가 그 실체다. 한자에서 유추할 수 있듯 일을 단계적으로 진행하는 순서·방도·절차를 의미한다.
일본어에서 보통 '준비가 잘 되다', '순서를 정하다', '절차를 갖추다'라고 할 때 쓰인다.
우리말 순화어로는 '채비', '단속'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일상에서는 '주의해 지켜보다', '마무리(를) 잘하다' 용도로 쓰인다. 규범과 현실의 괴리다.
여기서 '단도리'는 굳이 쓸 필요가 없다. 문맥상 '단도리하는 것' 대신에 '잘 보듬고 배려하는 것' 정도면 충분하다. 소통을 강조하면서 고린내 나는 일본말을 동원해서야 되겠는가.
◇ 뗑뗑뗑?
TV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퀴즈 등을 풀 때 '○○○'만 나오면 너나 할 것 없이 '뗑뗑뗑'은 무엇일까요? 하고 있다.
가히 요즘 가장 많이 쓰는 일본말 같다. 뗑의 실체(實體)는 점(點)이다. 점이 일본 말로는 '뗀/뗑[てん]'이기 때문이다. 부지불식간에 대놓고 일본말을 쓰는 셈이다.
대안은, 직접적으로는 '공공공(空空空)'이다. 사람이면 '아무개, 몇 자(字)입니다.' 아니면 '무엇일까요, 몇 글자입니다'가 바람직하다.
이게 번거롭고 무거우면 차라리 '삐리리'가 낫다. '공개하기 어렵거나 감추고 싶은 말 대신 쓰는 말'이 부사 삐리리다.
'삐리릭'이 아니라 삐리리다. 또, 뗑뗑이 무늬 옷이 아니라 '물방울무늬 원피스' 혹은 '점무늬 셔츠'를 권장한다. 이참에 짚어보면, 소수점 이하 숫자를 읽을 때 '영'(零,0)만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다.
0이 수(數) 단위니까 0.108을 '영점일영팔'[영쩜일령팔]로 읽으며 공(空)을 따돌리는데,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다.
당장, 휴대전화 앞번호 010은 '공일공'이다. 제임스 본드 007은 아직도 '공공칠'이다. 합리적 관용 존중이다. 영어도 그렇다.
1905년은 영어로 [나인틴제로파이브]와 [나인틴오파이브]로 읽는 것, 둘 다 인정한다.
'똔똔'도 잘 쓰이는 말이다. 아저씨들이 많이 쓴다. 역시 일본말이다. 'とんとん'이 실체다. '엇비슷하다', '어상반하다', '팽팽하다' 등을 대신 쓸 수 있다.
'또이또이'는 우리말이다. '똑똑히'의 충청 방언으로 '비슷하다/똑같다/엇비슷하다' 뜻으로 쓰인다. 아직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오르지 못했으나 우리말샘(오픈사전)에서는 인정한다.
◇ 삐까뻔쩍?
나이 든 사람, 그중에서도 아저씨들이 주로 잘 쓴다. 삐까(ぴか)가 일본 말로 '번쩍', '반짝', '뻔쩍', '빤짝' 등의 뜻이다.
그러니 '삐까뻔쩍'하면 잡탕 같은 이상한 말이 된다. "오늘 무슨 좋은 일 있나? 옷이며 구두며 번쩍번쩍하네?" 혹은 "멋진데. 아주 근사하구먼"이라고 고쳐 말해야 옳다.
'곤색'도 생명력이 질긴 것 같다. '감색'(紺色)의 '감'(紺)이 일본어 발음으로 '곤'[こん]이다. 그러니 이것도 한일(韓日)이 뒤섞인 말이다. 우리말로는 '감색', '진청색', '진남색'이다.
여름 생선 중 '아지'라는 생선이 있다. 아지의 실체는 'アジ', 역시 일본말이다. 우리말로는 전갱이다. 아지보다 발음이 어렵고, 음절이 하나 더 많으며, 무엇보다 생선 이름 같지 않아 덜 쓰이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이제부터라도 아지라 하지 말고 전갱이라고 제대로 부르자.
◇ 섭씨/화씨
섭씨는 '攝氏'다. 정확히는 섭이사(攝爾思)다. 스웨덴 천문학자 안데르스 셀시우스(1701∼1744)의 이름이 중국어 음역으로 바뀐 것인데, 중국인들이 성(姓)의 앞 글자 섭(攝)만 따고 씨(氏)를 붙인 것이다.
그걸 그대로 들여왔다. 굴욕적인 일이다.
화씨는 더하다. 다니엘 파렌하이트(1686∼1736)는 지금은 폴란드 땅인 독일 단치히 태생 물리학자로 중국에서 이름이 화륜해(華倫海)로 둔갑한다. 성(姓)에서 'Fa'의 앞 글자 화(華)만 떼어내고 씨(氏)를 냅다 붙인 것이다. 그냥 그걸 받았다.
비루한 사례다. [f]의 [ㅍ] 대응도 속절없이 무너진다.
'이미 굳어진 외래어는 관용을 존중한다'가 현행 외래어 표기 5원칙 중 다섯째 조항이다. 그러나 새롭게 사정한다면 이건 고쳐져야 할 것이다. 언뜻 떠오르는 대안은 섭씨 대신 '셀 기온'이나 '셀 도(度)',' 화씨 대신 '파 기온'이나 '파 도(度)' 정도가 어떨까 싶다.
강성곤 현 KBS 한국어진흥원 운영위원
▲ 전 KBS 아나운서. ▲ 정부언론공동외래어심의위원회 위원 역임. ▲ 현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언어특위 위원. ▲ 전 건국대·숙명여대·중앙대·한양대 겸임교수. ▲ 현 가천대 특임교수.
* 더 자세한 내용은 강성곤 위원의 저서 '정확한 말, 세련된 말, 배려의 말', '한국어 발음 실용 소사전'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정리 : 이세영 기자>
sev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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