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굿모닝 홍콩’ [국립정동극장 제공]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슬픈 일도 괜찮아, 세상 끝에 묻어 버리고 올게.” (영화 ‘해피투게더’ 중 포보가 아휘에게 하는 대사)
사랑받길 원했지만,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던 외로운 청춘(‘아비정전’)이었고, 예술과 현실 사이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배우(‘패왕별희’)였으며, 이상을 품은 순수한 청년 경찰(‘영웅본색’)이었다. 복잡하고 섬세한 내면을 가진 영혼. 온통 ‘강한 남자’가 주인공이었던 ‘홍콩 누아르’에 등장한 그는 대한민국 X세대의 성장통을 대변했다.
‘문화 대통령’ 서태지에 취했고, 개인의 존엄과 자유 속에서 문화적 풍요를 누렸던 한국의 X세대에게 장국영은 ‘영원한 우상’이었지만, 홍콩의 현실은 멀게만 느껴졌다. 연극은 그 간극을 비집고 들어간다. 마주할 일 없을 것 같은 두 나라의 각기 다른 세대는 ‘홍콩’이라는 공간에서 국경과 세대를 넘어 마주한다. 완전히 다른 목적을 가지고 홍콩에 왔지만, 이곳에서 자유를 외치는 MZ(밀레니얼과 Z세대를 합친 말) 세대 시위대와 만나 서로를 이해하고 연대하며 ‘소중한 가치’를 지켜주는 모습을 그려간다.
연극을 이끄는 두 개의 큰 줄기는 ‘장사모’의 오마주 영상 촬영기와 홍콩의 MZ 시위대의 우산혁명이다. 연극의 발단이 된 것은 ‘홍콩 시위’였다. 창작진에 따르면 극본을 쓴 이시원 작가는 홍콩의 우산시위 현장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 퍼지는 뉴스를 본 뒤 작품을 구상하게 됐다.
연극 ‘굿모닝 홍콩’ [국립정동극장 제공] |
연출을 맡은 최원종은 “알려고 해도 알 수 없는 먼 나라의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고 홍콩의 젊은 세대가 한국의 민주화 세대가 부른 이 곡의 감성을 공유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지 하는 생각, 그 마음을 ‘어떻게 풀어낼까’라는 화두에서 시작됐다”고 말했다.
연극은 ‘홍콩영화 황금기’를 보낸 세대를 주인공으로 삼았다. 흔히 ‘누아르’로 대표되는 홍콩 영화에선 혈연보다 더 끈끈한 ‘의리’로 묶인 친구와 형제들이 서로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우는 ‘총잡이 영웅’의 모습을 그려간다.
그 시절 홍콩영화는 상상 가능한 모든 것이 그려지는 세계였다. 1980~90년대 정치적 자유를 온전히 갖지 못했고, 표현할 용기가 넉넉하지 못했던 한국 사회에 홍콩 영화는 ‘자유의 상징’이었다. 최 연출가는 “홍콩 영화엔 한국 영화가 갖지 못했던 폭발적이고 자유로운 표현의 자유가 있었다”며 “홍콩 영화를 보며 자유로움에 대한 판타지를 꿈꿨는데 어느 순간 한국이 그만큼의 자유로운 나라가 됐을 때, 홍콩은 점차 표현의 자유를 잃어가며 문화적으로 쇠퇴하게 됐다”고 봤다. ‘자유’을 꿈꾸게 했지만 이제는 자유로움을 상실한 나라이자 잊혀간 대중문화 콘텐츠를 향한 안타까움이 연극의 기저에 자리한다.
‘사라짐’을 상징하는 배우가 바로 장국영이었다. 장국영은 홍콩 누아르 안의 새로운 남성상이었다. ‘영웅본색’ 시리즈의 주윤발(저우룬파), 유덕화 등 홍콩 누아르가 그린 거친 영웅들과는 또 달랐다.
최 연출가는 “홍콩 영화에서 다른 배우들이 죽음을 불사하는 영웅적 모습을 그릴 때 장국영은 특이하게도 누군가의 보살핌이나 도움을 받을 만큼 연약하고 현실의 삶을 불안하게 견디는 외로운 사람으로 나왔다”고 했다.
연극 ‘굿모닝 홍콩’ [국립정동극장 제공] |
불완전하고 모순적인 인간, 자아 정체성을 고통스럽게 고민했고 거센 운명 앞에 저항하다 끝내는 무너지는 콘텐츠 속 장국영은 ‘상처받기 쉬운 인간’의 본모습을 꺼내왔다. 그 시절은 중국 반환을 앞두고 홍콩 사회 전반에 ‘미래에 대한 불안’이 감돌던 때이기도 했다. 그는 “그런 배우가 2003년 4월 1일 만우절에 만다린 호텔에서 투신했을 때 사람들은 ‘거짓말 아니냐’는 생각으로 며칠을 보내다, 우리는 왜 그를 더 생각하고 신경 써주지 못했지 라는 안타까운 마음이 홍콩에도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홍콩영화를 보며 저마다의 꿈을 꿨던 ‘장사모’ 회원들은 한국 현대사에서도 독특한 세대다. 어느덧 기성세대가 된 이들은 앞세대가 남긴 민주주의 사회에서 누구보다 개인의 자유를 발산하며 살았다. 최 연출가는 “우리나라가 민주화 운동을 통해 자유를 쟁취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본격적으로 민주화 운동을 한 세대는 아니었다”며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피 흘리며 거리로 나온 홍콩의 20대를 만나며 어떤 마음을 갖게 될 것인지가 이시원 작가의 화두였다”고 말했다.
연극은 ‘장사모’의 오마주 촬영과 우산혁명 시위를 오가며 이어진다. 작은 무대에 올라온 연극은 전혀 다른 두 세계를 그리면서도 한쪽도 모자람 없이 실감 나게 그린다. 두 세계가 너무도 이질적이라 판타지를 보는 듯한 기분마저 든다.
‘천녀유혼’ 오마주 영상을 찍는 ‘장사모’ 회원들의 모습은 B급 감성의 웃음 포인트이면서도, 꽤나 진지하게 끌고가는 이 신엔 극진한 팬심이 담겨있어 흥미롭다. 경찰과 대치하는 어린 시위대의 목숨 건 투쟁 역시 사실적이다. “홍콩 경찰이 홍콩 시민을 지켜야지 왜 공격을 하냐”는 청춘들의 외침이 시위 현장에 울려 퍼질 때 자유를 향한 이들의 갈망이 절절하게 다가온다. 시위대는 광둥어를, 홍콩 경찰은 만다린(중국 표준어)을 쓰도록 한 것도 의도적 전략이었다.
최 연출가는 “그 시절 홍콩영화는 모두 광둥어로 돼 있었고, 1997년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이후 언어에 대한 교육이 광둥어에서 만다린으로 바뀌게 됐다”며 “자유를 투쟁하는 학생들의 언어는 광둥어로, 국가 통치 시스템 안에 있는 사람들은 만다린으로 표현하도록 했다”고 말했다.
연극 ‘굿모닝 홍콩’ [국립정동극장 제공] |
연극은 ‘홍콩 누아르’ 세대는 물론 그 시대를 만끽하지 않았던 한국의 젊은 세대에게도 공감과 연대할 지점을 만들었다. X세대 ‘장사모’에 끼어 홍콩에서 장국영이 소장했던 ‘87년 나이키 에어조던2’를 구매한 한국의 MZ 유튜버의 이야기를 넣으면서다. 그는 시위대에 휩쓸려 경매에서 수억 원에 사들인 이 운동화를 잃어버린다. 홍콩의 청년 시위대 중 한 명은 그들이 ‘자유’라는 소중한 가치를 지키고자 했던 것처럼, 누군가에겐 소중했을 ‘나이키 운동화’을 찾아주고자 한다. 결국 피로 얼룩진 운동화 한 짝을 한국의 청년에게 전달하는 장면에선 객석에 눈물 바람이 인다.
최 연출가는 “‘쇼핑의 도시’에서 ‘장국영 에디션’이라는 가상의 설정을 통해 ‘자본주의의 상징’인 나이키 운동화를 내세웠다”며 “피투성이가 된 신발을 전해줄 수밖에 없었던 홍콩 시위대의 모습은 MZ 한국 청년과 40대 장사모의 마음에 일어나는 변화이자 이들을 돕고 싶다는 보편적 마음을 갖게 하는 장치였다”고 말했다.
저마다 자유로운 나라라고 추억했던 홍콩의 현재를 마주한 ‘장사모’와 함께 객석도 마음의 동화가 인다. 시위 현장에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 퍼지고, ‘장사모‘ 회원들이 ‘월량대표아적심(月亮代表我心)’을 부르면 시위대가 방탄소년단(BTS)의 ‘불타오르네’로 화답한다. 전 세계 Z세대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는 집회 현장마다 노래했던 BTS의 음악도 이 무대에서 다시 한번 상징성을 입었다. 시간을 거스른 두 나라, 두 세대의 끈끈한 연대였다.
2022년 초연한 ‘굿모닝 홍콩’은 지난해 국립정동극장의 ‘창작ing’ 지원 사업에 선정돼 관객과 만났고, 올해 2차 제작 지원에 선정 한 달간 공연을 이어가고 있다. 과거의 향수와 오늘의 이야기를 엮으며 다양한 세대를 아우른 이 연극은 오는 6월부턴 화성문화재단을 시작으로 안산, 대구, 밀양에서 대극장 공연을 이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