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등반하는 아이. |
봄볕이 따사로운 3월 넷째 주 토요일, 우리는 구슬땀을 흘리며 폭신한 흙길과 조릿대가 우거진 산길을 올랐다. “아빠, 칠성대까지는 얼마나 남았어?” 아들 서진이가 한 질문에 나는 손목에 찬 스포츠 시계를 확인했다. “1.4㎞ 왔으니깐, 앞으로 1㎞만 더 가면 될 것 같아. 날이 덥지? 재킷은 벗고 갈까?”
이번 백패킹의 목적지는 전북 진안군과 완주군에 걸쳐 우뚝 선 운장산이다. 55번 지방도로가 지나는 피암목재(570m)를 출발한 우리는 운장산의 서봉인 칠성대(1120m)를 지나 중봉인 운장대(1126m)까지 오를 계획이었다. 칠성대로 향하는 길은 다채로웠다. 바르게 닦인 흙길 너머로 뾰족한 바윗길이 우리를 맞이했다. 활목재(880m)를 지나자 서늘한 바람이 엄습했다. 민소매 차림으로 산을 오르던 우리는 배낭에 넣었던 바람막이 재킷을 다시 꺼냈다.
아이와 등반할 때는 준비를 더 철저히 해야 한다. |
“아빠! 여기는 아직 겨울인데?” 서봉 정상부를 200m 남겨둔 지점이었다. 낮 기온이 22도인 온화한 봄날이었지만, 고지대의 등산로는 새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다. 눈길은 제법 미끄러웠다. 가파른 경사를 오르며 아이젠을 챙겨오지 않은 나를 자책했다. “서진아, 아빠가 먼저 미끄럽지 않은 곳을 찾아서 밟고 오를 테니, 내 발자국을 쫓아와!” 긴 로프로 연결된 안전 난간과 등산 스틱에 의지해서 한걸음 또 한걸음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능선에 올라서자, 진안고원으로부터 불어오는 흔들바람이 뺨을 스쳤다.
칠성대 일출을 보고 있는 아이. |
“안녕하세요? 다시 만났네요!” 올라오기 전 주차장에서 만났던 두 청년 박상수(36)씨와 박기환(34)씨가 반가운 인사를 건넸다. “오늘 같은 날씨에 눈을 밟게 될 줄은 몰랐네요!” 산이라는 공감대를 나누다 보니, 초면인데도 어색함은 사라졌다. 그때였다. ‘투두두두’ 프로펠러 소리와 함께 물탱크를 매단 헬기 한대가 하늘 위를 지나갔다. “어제 경남 산청에서 산불이 났던데요.” 헬기가 지나간 방향을 바라보며 상수씨가 말했다. “아직 진화 중인가 봐요. 큰일이네요. 건조한데다 바람까지 불어서.” 기환씨가 말을 이었다. 순간, 숙연한 기운이 감돌았다.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서진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빠, 그런데 산불은 왜 나는 거야? 산에 올 때는 화기를 가져오면 안 되잖아! 그런데 어떻게 불이 나?” 물론 산불이 나는 이유는 다양하다. 누군가의 실화로 인한 인공 발화일 수도 있고, 자연 발화의 가능성도 없지 않다.
산에서 하는 식사는 비화식으로 해야 한다. 이날 다른 등산객과 함께 먹은 편육, 연어회, 양념치킨 등. |
내가 아이와 첫 백패킹을 나섰던 4년 전 어느 봄, 아이에게 강조했던 말이 있다. 바로 ‘리브 노 트레이스’(Leave No Trace), 줄여서 ‘엘엔티’(LNT)다. 번역 그대로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는 의미로, 사람이 자연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자는 취지의 야외 활동 수칙이다. 엘엔티는 일곱가지를 함의한다. 하나, 미리 준비하고 계획한다. 둘, 금지된 구역을 걷거나 야영하지 않는다. 셋, 발생한 쓰레기는 모두 되가지고 온다. 넷, 화기는 허용된 장소에서만 사용한다. 다섯, 있는 그대로 보존한다. 여섯, 야생 동식물을 존중한다. 일곱, 타인을 배려한다. 지금까지 나는 수많은 산을 걸으며 이 내용을 아들에게 주지시켜왔고, 그렇기에 아들은 누구보다 엘엔티 수칙을 잘 알고 있었다. 일부 야영장과 대피소를 제외한 국내 산림 지역에선 화기 소지가 불법이다. 산행 중에 먹는 식사는 불을 사용하지 않는 비화식으로 준비해야 한다.
칠성대 일출을 보고 있는 아이. 박준형 제공 |
“이야, 서진이 대단한걸? 화기 휴대가 불법이라는 것을 8살 초등학생도 아는데, 모르고 지키지 못하는 어른들이 있나 보다.” 상수씨의 너스레에 아들은 으쓱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같이 식사할까요? 다들 비화식이죠?” 각자의 메뉴를 모아봤다. 나는 보온병 온수로 데운 컵라면과 편육을, 기환씨는 양념치킨을, 그리고 상수씨는 연어회를 내놨다. “어떤 계기로 백패킹을 시작하게 되셨어요?” 산해진미 부럽지 않은 비화식의 향연 속에 각자의 경험을 털어놓는 우리들, 칠성대의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글·사진 박준형 ‘오늘도 아이와 산으로 갑니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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