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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파면… 그래서 더 기이한 말 "계몽됐다" [영화로 읽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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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 정치학 박사]

영화 '다운폴'은 히틀러가 베를린 총리 관저 지하 82m 깊이에 구축한 '총통 방공호'에서 보낸 그의 마지막 14일간의 모습을 재현한다. 히틀러의 마지막 타자打字 여비서였던 트라우들 융에(Traudl Junge)의 증언을 기반으로 제작했다 하니 작가나 감독의 상상만은 아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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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히틀러는 샤우팅 한방으로 참모들의 입을 막아버린다.[사진|더스쿠프 포토]


트라우들 융에는 1942년부터 히틀러를 가장 지근거리에서 관찰한 사람이다. 벙커 속에서 자살한 날 히틀러가 구술하는 유언장을 타이핑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니 히틀러의 모습을 가장 생생하게 증언할 수 있었을 듯하다.

그 여비서가 증언한 히틀러의 모습은 영화가 보여준 그대로다. 장군과 참모들을 세워놓거나 앉혀놓고 손을 떨어가면서 끊임없이 일방적으로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지시한다. 그 와중에 누군가 용기를 내어 조금이라도 부정적인 의견이나 의문을 제기하면 그의 전매특허인 분노의 '샤우팅'을 터뜨린다. 샤우팅 한방으로 모든 참모들을 '입틀막' 해버린다.

그러나 기이한 것은 장군과 참모들 어느 누구도 밖에서 모여 자기들끼리 히틀러의 독선과 독단을 성토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이다. 모두 히틀러의 '지적 우위'와 통찰력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분위기다.

난폭한 독재자이기보단 17~18세기 유럽의 '계몽군주(prince of enlightenment)'에 가깝다. 17~18세기 사상적 흐름으로서의 '계몽주의'는 복잡다단하기는 하지만 초기 계몽주의는 단순히 '무지한 민중을 지식인들이 깨우쳐줘야 한다'는 믿음이다. 참모들은 모두 '무지몽매한 개돼지'를 자처한다.

미국의 역사학자 로렌스 버크(Lawrence Birke)는 그의 히틀러 연구서 「계몽주의 철학자로서의 히틀러: 국가사회주의에 나타난 계몽주의의 흔적들(Hitler as Philosophe: Remnants of the Enlightenment in National Socialism‧1995년)」에서 히틀러의 특성을 '무지한 민중을 깨우쳐줘야 한다'는 '초기 계몽주의적' 사명감을 가졌던 인물로 파악한다.

영화 속에서 '위대한 계몽군주'에게 '계몽당한' 독일 국민들과 장군들은 순수 아리안족이 세계를 지배해야 하고 슬라브족들과 유대인은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할 기생충이라는 깨달음을 얻고 전쟁과 인종청소에 떨쳐나선다. 결코 그들의 탁월한 계몽 총통을 의심하지 않는다.

히틀러는 그의 18세기 선배격인 러시아의 예카트리나 2세(Yekaterina II), 신성로마제국 2대 황제 요제프 2세(Joseph II) 등 탁월한 계몽군주들을 벤치마킹한 계몽 총통의 면모를 보여준다. 그러나 예카트리나 2세나 요제프 2세 모두 전체주의적 절대군주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고, 히틀러 역시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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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대통령에게 계몽당했다는 진술은 여전히 고약하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히틀러와 동향인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는 150여년 후 독일에서 히틀러라는 시대착오적인 계몽 군주가 등장하리라는 것을 예견이라도 했는지 「계몽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1784년)」이라는 논문에서 중구난방식의 계몽주의에 경고를 남겼다.

"계몽이란 인간이 스스로를 가두고 있는 미성숙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스스로를 가두고 있는 미성숙 상태'란 누군가의 가르쳐주지 않으면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다. 이런 미성숙 상태가 정말 사고思考할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지도해주지 않으면 자신이 지니고 있는 지성마저 사용할 용기가 없어서라면 그것은 스스로가 자신을 가둬버린 것이다." 칸트는 논문 마지막에 '감敢히 생각하라(Sapare aude!)'고 외친다.

다시 말하면 자기 자신이 이미 갖고 있는 지성을 사용할 용기를 갖는 것이 진정한 계몽의 원칙이라고 밝힌다. 칸트는 "게으름과 비겁함, 무책임이 너무나 편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성년이 돼도 기꺼이 미성숙의 상태에 안주하려고 한다"고 개탄한다.

요즘으로 치면 '캥거루족'인 셈이다. 자신을 대신해서 누군가 그 골치 아픈 생각들을 대신 해주기 때문에 안심하고, 골치 아프게 생각하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고 말겠다는 결연한 자세로 '생각'이라는 것을 거부한다.

물론 본인들은 생각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 생각들은 자신들의 오랜 고정관념들을 이리저리 자리만 바꿔놓거나 강화하는 것뿐이다. 칸트가 인정했던 진정한 계엄 군주는 프러시아의 프레데릭 2세(Frederik II‧1740~1786년)뿐이었다.

프레데릭 2세는 그의 '신민臣民'들에게 이같은 가르침을 무한반복했던 군주다. "그대들이 생각하는 바를 최대한 주장하라. 그대들이 복종해야 할 것은 내가 아니고 그대들의 생각이다." 계몽 총통 히틀러와는 거리가 멀다. 프레데릭 2세는 '감히 생각하라(Sapare aude!)'를 외친 반면 히틀러는 '네 따위가 감히 생각하냐?'고 격노한다.

온 나라를 혼돈으로 몰아갔던 대통령 탄핵소추를 다루던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마침내 종결됐다. 재판관 8인 전원일치의 의견으로 파면이 결정됐다. 그 혼란 중에 온갖 괴이한 일들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배울 만큼 배운 듯한 분들이 대통령의 계엄령을 '계몽령'이라 칭하고, 자신도 이참에 비로소 '계몽됐다'고 이곳저곳에서 벌였던 '계몽챌린지'는 단연 압권이었다. 칸트의 말처럼 '가방끈'과 '지성'과는 별 상관관계가 없는 모양이다. '계몽(enlightenment)'이란 말 그대로 심봉사가 눈을 떴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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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중 일부는 아직도 ‘계몽이 필요하다’고 여기는 걸까.[사진|뉴시스]


가히 우리 귀에 익은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주님의 놀라운 은총)'의 가사와 같은 이야기다. "주님의 놀라운 은총! 그 음성은 얼마나 달콤한가! 그 음성은 나 같은 불쌍한 영혼을 구원하도다! 나는 한때 갈 곳을 잃고 헤매었지만 이제는 구원받았도다. 나는 장님이었지만 이제야 세상이 보이도다(Amazing grace! How sweet the sound. That saved a wretch like me! I once was lost, but now am found: Was blind, now I see.)." 전前 대통령 입장에서는 헌법재판관 8인 중 단 한명의 눈도 뜨게 해주지 못했다는 사실에 자괴감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아직 계몽군주가 필요했던 17세기 유럽이나, 계몽문학이 성행하고 「독립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계몽 신문에 의존해야 했던 개화기나 해방 후 '농촌계몽운동' 시절을 벗어나지 못했거나 그 시절에 향수를 느끼는 것일까, 히틀러의 시대가 그러했듯이 민주공화국 국민들이 아무 권력자에게나 기꺼이 계몽당할 준비가 돼있으면 비극은 되풀이될 수밖에 없겠다.

김상회 정치학 박사|더스쿠프

sahngwhekim535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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