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다애 디자이너 mnbgn@ |
캐릭터의 동그란 눈, 빈티지한 색감, 손맛 나는 그림체까지… 개봉 이후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명작'으로 불리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지브리' 작품을 연상케 하는 이미지가 최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잇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이 사진을 지브리풍으로 바꿔줘"라는 요청 한 줄만으로 사진을 지브리 감성 가득한 이미지로 변환할 수 있는데요. 챗GPT의 챗GPT-4o 이미지 생성 모델이 출시되면서 더 쉽고 정교하게 이미지를 생성할 수 있게 된 데 따른 겁니다.
이를 단순한 유행으로 치부할 순 없습니다. 오픈AI의 챗GPT로 생성형 인공지능(AI) 붐이 일면서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메타, 애플 등 굴지의 빅테크들이 일제히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AI 전쟁'에 뛰어들었는데요. 올해 역시 천문학적 투자를 이어가며 차별화를 꾀할 전망이죠.
다만 이 같은 움직임이 대중에게 크게 와 닿진 않았습니다. 검색 엔진, 추천 알고리즘, 번역기 등 일상에서 흔히 사용하는 기능에 AI 기술이 스며들어 있었지만 인공지능(AI)의 발전을 온몸으로 인식할 기회는 적었는데요. "지브리풍으로 바꿔줘"라는 요청이 세계 곳곳에서 쇄도하면서, AI가 대중화의 물꼬를 본격적으로 텄다는 평가가 나오죠.
실로 AI는 이미 우리 일상 곳곳에서 활용되고 있습니다. 봄옷을 사기 위해 들른 옷 가게에서도, 신상 화장품이 나왔다고 해서 달려간 화장품 코너에서도 AI의 발전을 체감할 수 있는데요. 패션·뷰티 업계 역시 AI와의 미묘한 동행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H&M 로고. (AP/뉴시스) |
최근 'AI 모델'이 패션 업계의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건 글로벌 패스트패션 브랜드 H&M 때문이었습니다. 스웨덴에서 시작한 H&M은 코스, 아르켓, 앤아더스토리즈 등 다수의 유명 브랜드를 산하에 거느리고 있는데요. 전 세계 75개국 4000여 개 매장을 운영하고 있죠.
H&M은 지난달 AI를 활용해 패션모델 30명의 '디지털 트윈(쌍둥이)'을 제작해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마케팅에 활용할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패션 매체 비즈니스오브패션(BoF) 등에 따르면 H&M은 모델 30여 명, 이들의 에이전시와 모델의 '디지털 트윈'을 생성하는 계약을 맺었습니다. H&M은 AI로 생성한 모델의 이미지를 마케팅 캠페인 등에 활용할 예정이죠.
H&M에 따르면 AI 모델에 대한 권리는 모두 실제 모델에게 있습니다. 사용 권한이 H&M이 아닌 모델에게 있어, 모델은 자신의 AI 쌍둥이를 다른 패션 브랜드를 위해서도 사용할 수 있는데요. H&M 측은 AI 모델을 사용할 때도 실제 모델과 긴밀한 협의를 거치며 허가를 받고, 사용에 대한 대가도 정확히 지급할 것이라고 강조했죠. 워터마크를 통해 소비자에게 AI가 생성한 이미지라는 것을 명확하게 알 수 있게 할 것이라고도 부연했습니다.
H&M이 묻지도 않았는데(?) '실제 모델의 권리'를 강조한 이유는 명확합니다. AI 모델에 대한 거센 우려를 이미 목격했기 때문이죠.
AI 모델 이슈는 이미 2년 전 한 번 발발한 바 있습니다. 청바지로 유명한 패션 브랜드 리바이스는 2023년 AI 모델을 도입하기로 했는데요. 다양한 체형, 연령, 피부색 등을 반영해 고객들이 자신과 비슷한 모델이 제품을 착용한 모습을 볼 수 있게 한 겁니다.
그러나 이 발표는 실제 모델을 고용하지 않고 AI로 대체하는 행위가 적절한지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에 대해 리바이스는 AI 모델이 인간 모델을 완전히 대체하는 게 아니라 보완하는 역할을 한다고 해명했죠.
이후 H&M 발표에도 비슷한 취지의 비판이 나왔습니다. AI 모델 제작이 모델들은 물론, 사진작가, 메이크업 아티스트 등 관련 업계의 일자리를 앗아갈 것이라는 우려가 상당한데요. 영국 패션모델 노동조합 에퀴티는 "모델이 자신의 초상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갖고 사용에 대한 공정한 대가를 받는 게 필수적"이라며 "H&M이 모델에게 디지털 복제품에 대한 권리를 부여한 것에 대해 지지하나, (계약 시) AI 보호 조항을 포함함으로써 약속을 뒷받침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패션 업계가 비판에도 AI 모델을 도입하는 건 비용 절감 때문입니다. 기본적으로 모델 촬영을 하기 위해선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듭니다. 모델 인건비는 물론 헤어와 메이크업을 담당하는 스타일리스트, 사진작가, 스튜디오 등 많은 인원, 또 장소가 필요하죠. 이렇게 시간과 자본을 들여서 촬영을 마치더라도 결과가 반드시 만족할 만한 퀄리티로 귀결되는 건 아닙니다. 모델의 계약 기간이라는 제약도 있죠.
반면 AI 모델은 투입 비용과 시간을 줄이면서도 완성도를 높일 수 있습니다. 결과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수정에 수정을 거듭할 수 있는 데다가, 모델의 '사생활 리스크'에서도 자유롭습니다.
기사와 직접 관련 없는 자료용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
패션뿐일까요. 뷰티 업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성비 맛집'으로 입지를 굳힌 균일가 생활용품점 다이소에서도 AI 모델을 발견할 수 있는데요. 다이소의 뷰티 매대에는 수많은 여성 모델들이 제품을 들고 있거나 바르는 모습이 담긴 광고 이미지가 붙어 있습니다. 대다수가 생성형 AI로 형성한 AI 모델로, 이미지 하단에는 '생성형 AI로 제작되었습니다'라는 문구가 안내돼 있습니다.
다이소가 품질 대비 저렴한 가격을 유지할 수 있는 건, 이런 광고 등 유통 전반에 들어가는 각종 비용을 절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다이소에 저렴한 AI 모델이 등장하는 건 놀랍지 않지만, 일부 소비자 사이에선 AI 모델 활용이 오히려 괴리감을 준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화장품의 경우 발색, 제형 등 실제와 유사한 시각적 체험이 중요한데 단순 보정을 넘어선 창조가 옳냐는 맥락이죠.
성형외과 광고에 대해서는 '소비자 기만이 아니냐'는 비판도 나오는데요. 미용의료 정보 플랫폼에 접속해보면 모델의 얼굴을 내세운 수많은 이벤트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쌍꺼풀 수술부터 피부 레이저, 지방 분해 주사 등 키워드를 내건 이벤트 글은 모두 이미지를 첨부해 눈길을 끄는데요. 역시 적지 않은 이미지 속 모델이 AI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생성형 AI로 만든 모델'임을 대번에 알아차리긴 어려웠습니다. 소수의 이미지에만 'AI 모델'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기 때문인데요. 실제 시술 결과처럼 보일 수 있어 '소비자 기만'이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기도 합니다. 다만 광고에 AI 모델을 활용할 경우, 해당 모델이 AI로 생성됐다는 사실을 명시해야 하는 구체적인 법적 의무는 없습니다.
프리랜서 매치 플랫폼 크몽에 게재된 AI 광고 모델 제작 업체들. (출처=크몽 캡처) |
이렇다 보니 정부 차원에서 관련 제도를 마련하는 움직임에도 힘이 실립니다.
유럽연합(EU)은 내년 8월 시행되는 AI 법에서 AI 이미지일 경우 반드시 'AI 라벨'을 붙이도록 했습니다. 초상권 침해 논란을 차단하는 건 물론 소비자들이 AI 활용 여부를 판단할 수 있도록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려는 목적이죠. 미국 뉴욕주에선 6월 AI 모델 사용을 규제하는 내용이 담긴 '패션 노동자법'이 발효되는데요. AI 모델을 사용한다면 반드시 모델 당사자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중국도 AI 생성 콘텐츠에 대한 라벨링 의무화를 규정하는 새로운 지침을 발표했습니다. AI가 만든 텍스트와 이미지, 오디오, 비디오, 가상 콘텐츠 등 모든 디지털 결과물에는 눈에 보이는 라벨이나 관련 데이터를 포함해야 하는데요. 9월부터 시행될 예정입니다.
우리나라에선 지난해 말 인공지능 발전과 신뢰 기반 조성 등에 관한 기본법(AI 기본법)이 4년 만에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바 있는데요. 윤리적 문제와 기술 오남용 방지를 위한 규제를 강조했습니다. 드라마, 영화, 웹툰 등 생성형 AI로 만들어진 콘텐츠는 반드시 AI가 제작한 사실을 명시하도록 규정한 게 대표적인 내용이죠. 다만 규제 수준을 결정하는 시행령은 이제 논의를 시작하는 단계고요. 딥페이크 등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꼭 필요한 규제라는 의견과 콘텐츠 경쟁력을 해칠 수 있다는 의견이 맞서는 상황인 데다가, 상업 광고에 직접적인 표기 의무 여부도 향후 구체화될 것으로 보입니다.
기술이 아무리 발달했다고 하더라도, AI 모델에 거부감을 느끼는 소비자들은 아직 숱합니다. 다만 기업 입장에서 AI 모델은 비용을 절감하면서도 콘셉트를 더 잘 구현해낼 수 있는 간편한 방법인데요. 소비자들의 거부감을 줄이기 위해, 또 초상권 침해나 윤리적 비판을 피하기 위해 기업들은 AI 모델 도입을 이어가면서도 H&M처럼 실제 모델에게 많은 권한을 제공하는 등 인간 중심적 접근 방식을 택할 것으로 예측됩니다.
[이투데이/장유진 기자 ( yxxj@e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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