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포진 백신이 치매를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사진은 바이러스의 독성을 약화시킨 약독화 생백신 ‘조스타박스’와 바이러스 항원 단백질로 만든 재조합 사백신 ‘싱그릭스’. 위키미디어 코먼스 |
대상포진 백신이 치매를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백신을 접종한 노인과 접종하지 않은 노인을 장기간 관찰해 내린 결론이다.
미국 스탠퍼드대 연구진은 영국 웨일스 지역 노인 중에서 대상포진 백신 접종자와 비접종자를 7년간 추적한 결과 접종자의 치매 위험이 비접종자보다 20%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발표했다.
연구진은 “이는 지금까지 발표된 연구 중 백신의 치매 예방 효과를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증거”라고 밝혔다. 이전에도 대상포진 백신과 낮은 치매율 간의 상관관계를 주장하는 연구는 있었지만 대체로 건강 습관 등 다른 요인들의 영향을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직접적인 관계를 확인하지는 못했다.
대상포진은 수두-대상포진 바이러스(varicella-zoster)에 의해 발생하는 감염증으로 통증을 동반한 발진이 주요 증상이다. 대개 어린 시절 감염됐던 수두 바이러스가 신경세포에 장기간 잠복해 있다가 나이가 들거나 면역체계가 약해지면 다시 활성화해 대상포진을 일으킨다.
이번 연구는 웨일스에서 2013년 시행한 대상포진 백신 접종 프로그램 덕분에 가능했다. 당시 웨일스 당국은 백신 물량이 부족하자 9월1일을 기준으로 80살 미만인 사람을 우선해서 백신 접종 자격을 부여하고, 80살 이상인 사람은 접종 대상에서 제외했다. 첫 1년간은 79살인 사람만 접종할 수 있도록 했고, 그 다음 1년은 78살인 사람에게 접종 자격을 부여했다. 다른 요인과 상관없이 대상포진 백신이 치매 발병에 미치는 영향을 관찰할 수 있는 ‘자연 임상시험’ 환경이 조성된 셈이다. 당시 웨일스 주민들에게 접종한 백신은 바이러스의 독성을 약화시킨 약독화 생백신 ‘조스타박스’(Zostavax)였다.
대상포진 백신을 접종한 지 1년 반 이후부터 치매 진단 비율에서 차이가 나기 시작했다. 픽사베이 |
남성보다 여성한테서 더 큰 효과
2년 전 이 사실을 알게 된 스탠퍼드대 연구진은 71~88살 28만명의 건강 기록을 살펴봤다. 그 중에서도 특히 9월1일을 기준으로 1주일 전에 80살이 된 사람들과 1주일 후에 80살이 된 사람들의 이후 7년치 건강 기록에 가중치를 둬 비교했다.
분석 결과 2020년까지 전체적으로 8명 가운데 1명꼴로 치매 진단을 받았으나, 대상포진 백신을 맞은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치매 진단 비율이 20% 더 낮았다. 연구진은 “이번에 확인한 대상포진 백신의 예방 효과는 기존에 나와 있는 다른 의료적 방법보다 더 높은 것”이라고 밝혔다.
옥스퍼드대 폴 해리슨 교수(정신의학)는 뉴욕타임스에 “치매 위험을 20%까지 줄인다면, 현재 치매 발병을 늦추는 다른 방법이 별로 없다는 점을 고려할 때 공중보건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수치”라고 말했다.
연구진에 따르면 백신 접종 자격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치매 비율 추이를 보여주는 2개의 곡선은 1년 반만에 갈라지기 시작했다. 연구진은 학력 등 치매 위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다른 요인의 영향을 살펴봤으나 두 그룹 사이에 특별한 차이점은 발견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또 치매 예방 효과가 남성보다 여성에게서 더 크다는 것도 발견했다. 연구를 이끈 파스칼 겔드세처 교수는 “이는 면역 반응이나 치매가 발생하는 방식에서의 성별 차이 때문일 수 있다”고 말했다. 예컨대 일반적으로 백신에 대한 항체 반응은 여성한테서 더 강하게 나타난다. 대상포진도 남성보다는 여성한테서 더 흔하게 발생한다.
연구진은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캐나다 등 다른 국가의 건강 기록에서도 대상포진 백신이 같은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는 걸 확인했다.
연구진은 이번 발견을 검증하기 위한 대규모 무작위 대조시험을 계획하고 있다. 연구진은 “이번 발견은 신경계에 영향을 미치는 바이러스가 치매 위험을 높일 수 있다는 새로운 이론을 뒷받침한다”며 “향후 연구에서도 이번 발견이 추가로 확인된다면 치매에 대한 예방적 개입이 이미 가까이 다가왔다는 걸 말해준다”고 주장했다.
대상포진 백신의 치매 예방 효과는 바이러스 재활성화를 억제하거나 면역 체계를 활성화하는 데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픽사베이 |
대상포진 백신은 어떻게 치매를 억제할까
대상포진 백신이 어떻게 치매를 예방하는지는 아직 명확히 규명되지 못했다. 연구진은 일단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백신이 대상포진을 예방함으로써 바이러스 재활성화로 인한 신경 염증을 줄이기 때문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백신이 면역 체계를 더 광범위하게 활성화하는 데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물론 아직까지 알지 못하는 다른 기제가 작동하는 것일 수도 있다.
또 다른 대상포진 백신 싱그릭스도 치매 예방 효과가 있을까? 1세대 조스타박스에 이은 2세대 백신 싱그릭스는 유전자 재조합 기술을 이용해 바이러스의 특정 단백질만을 뽑아 만든 재조합 백신이다. 조스타박스와 같은 단일 접종이 아니라 2회 접종 주사제로, 접종 방식은 더 불편하지만 예방 효과는 더 좋다.
2024년 7월 옥스퍼드대 연구진이 국제학술지 ‘네이처 의학’에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2017년 10월 재조합 백신 승인 이후 생백신이 중단된 것을 계기로 두 백신의 치매 위험 예방 효과를 6년간 추적 비교한 결과, 치매 진단자 중 재조합 백신 접종자는 약독화 생백신 접종자보다 치매 진단까지 약 6개월이 더 걸렸다.
옥스퍼드대 연구의 주저자인 막심 타케 박사(정신의학)는 가디언에 “두 연구 모두 대상포진 백신 접종이 치매 위험을 줄인다는 가설을 강력하게 뒷받침한다”고 말했다.
싱그릭스 제조업체인 지에스케이(GSK)에 자문을 하고 있는 콜로라도대 의대 마리나 나겔 교수(신경학)는 “대상포진 바이러스는 신경세포에 숨어 있기 때문에 대상포진 백신이 인지 장애에 대해 특히 보호 효과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했다.
*논문 정보
A natural experiment on the effect of herpes zoster vaccination on dementia. Nature (2025).
https://doi.org/10.1038/s41586-025-08800-x
The recombinant shingles vaccine is associated with lower risk of dementia. Nat Med 30, 2777–2781 (2024).
https://doi.org/10.1038/s41591-024-03201-5
곽노필 선임기자 nop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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