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의 서재]
홍한별 번역가의 서재
23년 차 번역가 홍한별(50)씨는 지난해 한 출판사로부터 '백지 계약서'를 받았다. 번역에 대해 어떤 주제로, 언제까지 써도 상관없다는 계약 없는 계약서. 유명 작가가 아닌 이상, 출판 내용이나 시기가 명시되지 않은 백지 계약서를 받는 일은 극히 드물다. 그에 답하듯 홍 번역가는 지난 2월 에세이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를 펴냈다.
흰 종이 위에 흰 고래를 그리는 게 가능할까. 연필의 검은 목탄으로 흰 고래를 제외한 부분을 채우면 된다. 흰 여백이 바로 흰 고래다. 홍 번역가는 번역도 그에 비유한다. "끝없이 변화하는 언어를 한순간이라도 고정하려고 애쓰는 덧없지만 불가피한" 번역은 "흰 고래를 그리려는 시도". 단어를 옮길 수도, 의미를 옮길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지거나, 그보다 앞서 존재 자체가 쉽사리 무시되곤 하는 게 번역가의 숙명이라도, "그럼에도 번역을 하는 이유는 사랑이라고 해두자."
"제 생각에 세상에서 가장 좋은 직업은 날마다 책 읽는 직업이에요. 번역가로서 내가 책을 만들고, 거기 내 이름이 찍혀 나온다는 데서 오는 기쁨이 무척 크죠."
홍한별 번역가의 서재
편집자주
로마시대 철학자 키케로는 "책 없는 방은 영혼 없는 몸과 같다"고 했습니다. 도대체 책이 뭐길래, 어떤 사람들은 집의 방 한 칸을 통째로 책에 내어주는 걸까요. 서재가 품은 한 사람의 우주에 빠져 들어가 봅니다.23년 차 번역가 홍한별씨가 지난달 25일 서울 마포구 자택에서 그동안 옮긴 번역서 90여 권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최주연 기자 |
23년 차 번역가 홍한별(50)씨는 지난해 한 출판사로부터 '백지 계약서'를 받았다. 번역에 대해 어떤 주제로, 언제까지 써도 상관없다는 계약 없는 계약서. 유명 작가가 아닌 이상, 출판 내용이나 시기가 명시되지 않은 백지 계약서를 받는 일은 극히 드물다. 그에 답하듯 홍 번역가는 지난 2월 에세이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를 펴냈다.
흰 종이 위에 흰 고래를 그리는 게 가능할까. 연필의 검은 목탄으로 흰 고래를 제외한 부분을 채우면 된다. 흰 여백이 바로 흰 고래다. 홍 번역가는 번역도 그에 비유한다. "끝없이 변화하는 언어를 한순간이라도 고정하려고 애쓰는 덧없지만 불가피한" 번역은 "흰 고래를 그리려는 시도". 단어를 옮길 수도, 의미를 옮길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지거나, 그보다 앞서 존재 자체가 쉽사리 무시되곤 하는 게 번역가의 숙명이라도, "그럼에도 번역을 하는 이유는 사랑이라고 해두자."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홍한별 지음·위고 발행·272쪽·2만 원 |
문학책 등 700권 꽂힌 번역가의 서가
"제 생각에 세상에서 가장 좋은 직업은 날마다 책 읽는 직업이에요. 번역가로서 내가 책을 만들고, 거기 내 이름이 찍혀 나온다는 데서 오는 기쁨이 무척 크죠."
글을 읽고, 쓰고, 옮기는 게 그의 업(業)이다. 책을 좋아하는 그에겐 번역가가 최고의 직업이다. 장서 700권이 십진분류법에 따라 빼곡히 꽂혀 있는 서울 마포구 망원동에 있는 그의 서재를 최근 찾았다. 그는 서재에서 번역 작업을 한다.
문학 독자라면 그의 이름 석 자는 낯설지 않다. 지난해 서점가를 휩쓴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부터 애나 번스, 가즈오 이시구로, 버지니아 울프, 수전 손택, 조앤 디디온, 리베카 솔닛 등 유명 작가들의 작품을 우리말로 옮겨 왔다. 그의 손을 탄 책만 100권을 육박한다.
그가 번역한 작품 외에도 서가에는 수백 권의 책이 있다. 늘 글을 만지고 책을 만들다 보니 주기적으로 솎아내도 계속해서 책이 쌓인다. 가능하면 신간 위주로 정리한다. 도서관에서 사용하는 십진분류법에 따라 매겨진 번호대로 질서정연하게 꽂아둔다. 가장 많은 구간은 아무래도 800번대 문학 도서들. 그가 정한 적정 권수는 700권이다. 나머지는 버리거나 작두로 썰어 스캔해 PDF 파일로 정리한다. "책을 썬다는 게 너무 가슴 아팠지만 도저히 꽂을 데가 없어서 그렇게라도 공간을 확보할 수밖에 없어요."
홍한별 번역가는 도서관에서 사용하는 십진분류법에 따라 도서를 분류해 서가에 꽂아둔다. 주기적으로 구간을 솎아내 신간 위주의 700권 수준을 유지한다. 최주연 기자 |
윤동주 시·토니 모리슨 소설 읽고 "번역 해볼까"
TV도, 넷플릭스도 없던 어린 시절부터 책은 그의 유일한 재미였다. 읽을 책은 항상 부족했다. 번역에 관심이 생긴 건 고3 무렵. 윤동주의 시집 '별과 사랑의 시'에 실린 '바람이 불어'를 읽다 문득 영어로 옮겨보기로 했다. 영어 공부를 하면서 영한 번역만 했지 한영 번역은 처음이었다. "그때 느낌이 희한하게 너무 좋은 거예요. 내가 좋아하는 시를 다른 언어로 만들어 낼 수가 있다니." 대학 영문과 진학을 결심했다.
번역가로 인생 경로를 정한 건 연세대 영문과 4학년 재학 당시. 수업 시간에 원서로 읽은 토니 모리슨의 장편소설 '빌러비드'가 결정타였다. "책이 너무 아름다워서" 그는 영문과 대학원을 진학했다. '나도 번역을 할 수 있겠다'는 용기도 그때 생겼다. 당시 저작권 계약 없이 돌아다니던 해적판의 오역이 그를 번역으로 이끌었다.
'빌러비드' 속 주인공인 흑인 여성 노예가 도망치다 아이를 출산하고 우연히 만난 백인 여성이 그를 돕는다. "난산으로 고생하는 노예에게 백인 여성이 '오늘 밤을 버텨야 된다(Make it through the night)'라고 하거든요. 해적판에서는 이 대사를 '너는 이것을 밤새 만들어야 해'라고 옮긴 거예요. 이런 번역도 있는데 나도 할 수 있겠다, 진짜로 그랬어요."
집안 분위기도 한몫했다. 그의 두 살 터울 오빠는 홍한결 번역가다. 남매 번역가의 탄생 배경에는 "두 언어로 된 세상을 처음 보여준 아버지"가 있다. 그의 아버지의 삶은 한 편의 드라마다. 책이 귀했던 강원 출신인 아버지는 헌책방에서 영어 책을 사 모아 독학했다. 갈고 닦은 영어 실력은 6·25 전쟁 때 빛을 발했다. 당시 미군은 피란 떠나지 않은 주민들을 인민군 부역자로 간주해 처형했다. 하지만 아버지와 함께 방공호에 숨었던 주민들은 아버지의 영어 실력으로 모두 생을 부지했다. 그때 알게 된 미군의 소개로 아버지는 전후 서울에 취직해 평생 영어로 생계를 유지했다. 종종 번역 일도 했다.
홍한별 번역가는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 규칙적으로 일한다. 난도가 있는 책은 5쪽, 쉬운 책은 10쪽, 일일 작업 할당량을 정해놓았다. 그는 이렇게 하루하루 쌓아야 일이 되더라며 오늘의 할 일을 끝냈다는 소소한 성취감도 좋다고 했다. 최주연 기자 |
1990년대까지만 해도 번역은 부업으로 취급됐다. 번역가가 되기 위한 아카데미나 대학원 과정 역시 전무했다. 대학원을 다니던 홍 번역가는 출판사 아르바이트로 번역에 발을 들이게 됐다. 처음엔 "배운 것도 없이 맨땅에 헤딩하듯" 3권을 옮겼다. 이후 일이 계속 이어졌다. 그의 이름을 정식으로 내건 첫 번역서는 2003년 출간된 '권력과 테러'다.
번역할 책을 고르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의뢰가 들어오는 대로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만의 커리어도 차곡차곡 쌓였다. 번역가로서 그의 이름을 처음 알린 책은 수 클리볼드의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2016)였다. 1999년 미국의 한 고등학교에서 총기를 난사해 13명을 죽인 후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학생의 엄마가 쓴 책. 그가 가장 힘들게 작업한 책이기도 하다. "보통 번역할 때 저자 자리에 들어가 내가 저자인 것처럼 말을 하려고 하거든요. 이 책은 저자에게 감정이입하자니 내가 너무 피폐해지는 거예요. 당시 두 아들도 가해자와 비슷한 나이였거든요. 번역을 하면서도 '나는 아니야, 나는 이 엄마하고 달라' 생각을 계속하면서 그냥 할 수밖에 없었죠."
"좋아하는 책 번역, 더 바랄 게 없다"
노벨문학상, 공쿠르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인 부커상 수상작인 애나 번스의 '밀크맨'(2019)을 계기로 그는 문학 번역가로서 입지를 다졌다. "첫 소설 번역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중요한 타이틀이 제게 온 건 처음이었거든요. 그때 너무 기뻤어요." 이듬해 '밀크맨'으로 제14회 유영번역상도 받았다. 이후 문학서 의뢰가 밀려들었다. 그는 자신이 옮긴 책 '베스트3'로 '밀크맨'과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가즈오 이시구로의 '클라라와 태양'(2021),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꼽았다.
홍한별 번역가는 자신이 옮긴 책 중에서 '베스트 3'로 애나 번스의 '밀크맨'과 가즈오 이시구로의 '클라라와 태양',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꼽았다. |
그는 잘 읽히는 번역문을 쓰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소설을 옮길 때는 "내게 허락된 것보다 더 많이 개입할 때가 있다"며 "좀 더 가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김정아 번역가가 옮긴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현실에 맞서 싸우는 야생마 같은 여자 주인공 캐서린이 남편에게 반말을 하는 것으로 번역했기 때문. 다른 판본에서는 모두 존댓말을 쓴다. 그는 "그게 사소한 차이 같지만 읽어보면 캐릭터를 얼마나 다르게 보이게 하는지 놀랄 것"이라며 "물론 번역에 정답은 없지만 이런 해석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고 했다. 김석희 번역가가 옮긴 허먼 멜빌의 '모비딕'과 이세욱 번역가가 작업한 움베르토 에코의 '프라하의 묘지'는 그가 꼽은 번역서 '베스트 3'이다.
그는 요즘 손택의 에세이를 옮기고 있다. 20년 전 번역했던 글에 대한 수정 작업이다. "당시 제 능력에 부치는 작업을 해서 항상 손택에게 마음의 빚으로 남아 있었거든요. 이번에는 그 빚을 씻으려고 합니다." 고대하던 세계문학전집('제인 에어') 번역에도 참여하게 됐다. 벌써 2년치 일감이 밀려 있는 상태. "처음에는 제 이름도 못 걸고 하다 이제는 제가 좋아하는 책을 옮길 수 있게 됐어요. 더는 바랄 게 없네요." 요샛말로 '덕업일치'(취미와 일이 같다는 뜻의 신조어)를 이뤘다.
권영은 기자 you@hankookilbo.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