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현지시간) 미얀마 만달레이의 무너진 잔해 속에서 사람들이 물건을 찾고 있다. [AFP] |
[헤럴드경제=김영철 기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일(현지시간) 상호관세를 발표하면서 전 세계가 혼란에 쌓인가운데, 대지진 피해를 입은 미얀마 등 동남아시아 국가들에 유독 높은 상호관세를 부과해 그 배경이 주목된다. 트럼프 행정부가 이들 국가에 강도 높은 관세폭격을 가한 것은 결국 중국을 우회적으로 압박하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2일(현지시간) 영국 가디언과 미 외교전문지 더디플로맷은 최근 대지진 피해를 입은 미얀마를 포함한 동남아 국가들이 다른 나라들보다 높은 관세율에 직면해 제조업에 피해가 갈 수 있다고 보도했다.
캄보디아 49%·라오스 48%…‘고율관세’ 동남아 국가들 증시 하락
이날 높은 관세율을 부과받은 동남아 국가들은 ▷캄보디아(49%) ▷라오스(48%) ▷베트남(46%) ▷미얀마(44%) ▷태국(36%) ▷인도네시아(32%) 등으로, 10% 보편관세에 더해 상호관세를 부과받은 60여개국들 가운데 상위권에 속한다.
이에 반해 아시아를 제외한 유럽연합(EU·20%), 영국(10%), 호주(10%), 뉴질랜드(10%) 등 주요국들은 비교적 낮은 관세율이 매겨졌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일(현지 시간) 발표한 국가별 상호 관세율. [백악관 엑스(X·옛 트위터) 캡처] |
트럼프 대통령의 이날 발표 이후 동남아 국가들의 증시와 환율은 일제히 폭락했다.
베트남의 주요 주가지수는 6.2%까지 하락하며 4년여 만에 하루 최대 낙폭을 기록했다. 태국, 필리핀, 말레이시아, 싱가포르의 주가 역시 하락세를 보였다. 태국 바트화 환율 달러 대비 가치는 이날 0.8% 내려갔다.
자산운용사 롬바드 오디에르의 이호민 수석 애널리스트는 “아세안 경제는 미국 관세율 급등이 수출에 미치는 직접적인 영향과 글로벌 성장에 미치는 간접적인 충격으로 인해 향후 몇 개월 동안 상당한 역풍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며 “역내 각국 정부가 미국과의 양자 협상을 통해 관세율을 의미 있게 낮출 수 있을지 여부는 아직 지켜봐야 한다”고 분석했다.
가디언은 “자연재해에 취약한 동남아 국가들이 국제개발처(USAID)의 지원마저 삭감돼 이미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높은 관세를 부과받게 됐다”고 전했다.
아시아개발은행(ADB)에 따르면 가장 높은 관세율이 부과된 캄보디아의 경우 인구 17.8%가 빈곤선 아래 놓여있으며 48%의 관세율이 부과된 라오스의 빈곤율은 18.3%다. 미얀마의 경우 지난달 28일 미얀마 중부 만달레이 인근에서 발생한 규모 7.7 강진으로 지난 2일까지 총 3003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동남아 관세폭격 이면엔 중국 영향력 견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해 10월 러시아 카잔 브릭스 정상회의에서 통룬 시술릿 라오스 국가주석을 만나 악수하고 있다. [신화] |
동남아 국가들이 유독 높은 관세를 맞게된 배경에는 미국이 우회적으로 중국 때리기에 나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미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캄보디아와 라오스에 고율 관세를 부과한 것에 대해 지난 7년간 미국이 부과한 관세를 효과적으로 회피하기 위해 이 두 나라와 다른 나라를 거쳐 상품을 운송해 온 중국에 큰 타격을 입히려는 것이라고 짚었다. 베트남 역시 미국 관세를 피하려는 중국 기업의 환적 지점이 되고 있었다고 미 워싱턴포스트(WP)는 전했다.
실제 중국과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간의 교역은 2010년 이후 꾸준히 늘었다.
중국과 아세안의 무역 규모는 지난 2023년 9117억달러에 달했다. 중국의 2023년 아세안 직접투자도 전년 대비 34% 이상 증가한 251억2000만달러를 기록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해 10월 러시아 카잔 브릭스 정상회의에서 통룬 시술릿 라오스 국가주석을 만나 ‘중국·라오스 경제 회랑’ 건설의 필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일대일로 사업의 모범으로서 중국·라오스 철도의 추가 개발도 촉진하자고도 제안했다.
싱가포르 정부 산하 동남아연구소(ISEAS) 선임 연구원 시와게 다르마 네가라 박사는 “미국 정부는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국가들을 표적으로 삼아 중국의 투자에 타격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이들 국가의 제품을 겨냥함으로써 중국의 수출과 경제에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美기업도 동남아 관세 타격…나이키 등 직격탄
2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의 나이키 매장. [로이터] |
하지만 동남아 국가들에 고율 관세를 부과함으로써 중국을 견제하는 전략은 미국 산업에도 역효과를 줄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등에 공장을 두고 있는 나이키는 현지에서 생산된 제품을 미국에 판매할 때 국가별 관세를 물어야 한다.
미 CNBC 방송은 2023년 미국으로 수입된 신발 3분의 1이 베트남에서 제조됐다고 전했다.
블룸버그통신은 브랜드별로 ▷나이키 신발류 50% ▷룰루레몬 40% ▷아디다스 신발류 39% ▷애버크롬비 35% ▷나이키 의류 28% ▷갭 27% ▷아디다스 의류 18% 등이 베트남에서 생산된다고 전했다.
노스페이스와 팀버랜드, 반스 등의 브랜드를 보유한 미국 업체 VF 코퍼레이션 역시 중국과 베트남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이밖에 가구, 장난감 제조업체들도 베트남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고 CNBC는 전했다.
이날 관세 발표에 따른 여파로 나이키는 시간외 거래에서 7.02% 급락했다. 해외에서 생산을 주로 하는 갭(GAP)과 룰루레몬도 각각 8.49%, 11.32% 폭락했다.
CNBC는 “운동화부터 소파에 이르기까지 업체들이 중국 밖으로 생산기지를 옮기면서 베트남으로 눈을 돌렸다”면서 “이번 상호관세로 베트남에 생산기지를 구축한 미국의 대표 스포츠 브랜드 나이키 등에 타격을 줄 수 있다”고 짚었다.
네가라 박사 역시 “인도네시아에 대한 관세는 미국에는 역효과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더디플로맷은 “이번 관세 발표는 이미 미국이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과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에서 빠져 있는 상황에 더해 자유 무역에서 후퇴한 것을 의미한다”며 “미국은 여전히 동남아에서 안보적 존재감을 유지할 것이지만, 이 지역에서 미국의 경제적 영향력이 약해지면 중국이 해당 지역의 주요 경제 파트너로 부상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