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한 홈플러스 매장 라면 코너가 비어있다. 이성희 기자 |
국내 유통업계에 ‘한파’가 몰아치고 있다. 길어지는 경기 침체와 소비심리 위축, 고환율·고물가에 불안한 탄핵정국까지 겹치면서 한계 상황에 몰린 기업들이 속출하고 있다. 급성장 거품이 꺼진 전자상거래(e커머스)업체부터 온라인에 밀리며 좀처럼 돌파구를 찾지 못해온 오프라인 기업들과 스테디셀러 브랜드를 가지고 있는 제조업체까지 업태를 가리지 않고 벼랑 끝에 놓여 있다. 시장 재편과 함께 극소수만 살아남는 구조조정도 본격화하고 있다.
애경그룹 지주사인 AK홀딩스는 2일 공시를 통해 “그룹 재무구조 개선과 사업 포트폴리오 재조정을 위한 다양한 방안을 검토 중으로 아직 확정된 바 없다”고 밝혔다. 이 공시는 전날 불거진 애경산업 매각설을 수습하기 위해 나온 것이다. 샴푸·치약·비누 등 생활용품과 화장품을 제조·판매하는 애경산업은 애경그룹의 모태로, ‘2080’(치약) ‘케라시스’(샴푸) ‘트리오’(주방세제) 등 익숙한 브랜드를 다수 가진 알짜 계열사다.
애경이 모태기업까지 매각을 검토하는 데는 지난해 제주항공의 무안공항 참사 여파로 인한 유동성 위기와 이미지 타격이 컸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애경산업도 최근 생활용품 원가 상승 부담에다 핵심 화장품 수출국인 중국의 수요 약세 등으로 이중고를 겪어왔다. 그룹 입장에서는 향후 성장 가능성을 따졌을 때 애경산업보다 제주항공의 현금 창출력이 낫다고 판단했을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아모레퍼시픽과 LG생활건강 등 다른 뷰티·생활용품 기업들도 상황이 안 좋지만, 애경은 그중에서도 가장 취약한 데다 제주항공 사태라는 불운까지 겹친 것”이라고 말했다.
유통업계 구조조정 신호탄을 알린 것은 지난달 홈플러스의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 신청이었다. 홈플러스는 국내 대형마트 2위지만, 코로나19를 거치면서 소비 추세가 e커머스로 넘어가며 오프라인 유통 사업이 내리막길을 걸었다. 여기에 대주주인 MBK파트너스 인수 후 알짜 점포들을 지속적으로 매각하며 급변하는 시장 환경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e커머스라고 안전한 것은 아니다. 지난해 7월 티몬·위메프(티메프)가 잇따라 대규모 판매대금을 지급하지 못하면서 파문을 일으켰다. 당시 피해를 입은 입점업체들은 5만여곳으로, 티메프가 정산하지 못한 입점업체 판매대금은 1조2790억원에 달했다.
국내 명품 유통 e커머스 1위인 발란도 지난달 31일 기업회생을 신청했다. 발란 입점업체는 1300여곳으로, 미정산 금액은 수백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발란은 기업회생과 함께 인수·합병(M&A)에 나서겠다고 밝혔으나 현실 가능성이 없을 것이라는 게 동종업계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피해 판매자들은 현재 집단소송을 준비 중이다.
e커머스 업계 한 관계자는 “발란은 대면쇼핑이 어려웠던 코로나19 때 거품이 빠지면서 버틸 재간이 없을 것”이라며 “사업구조도 국내 개인 판매자들에게 열어준 플랫폼에 불과해 과연 누가 인수할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유통업계에서는 이들 기업의 취약한 재무구조를 보면 “예정돼 있던 수순”이라고 말한다. 홈플러스의 부채비율은 지난해 11월 말 기준으로 1408.6%나 됐다. 티메프는 2020년 전후로, 발란은 2023년부터 자본잠식 상태였다.
퇴출 목록에 이름을 올린 기업들이 위기에 몰린 속성은 각각 다를지 모른다. 그러나 최근 국내 상황이 내수 중심인 유통업체들에 심각한 타격을 줬기 때문에 더 버틸 수 없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유통업계 한 관계자는 “고물가 속에 내수가 부진하고 정국까지 혼란해지면서 소비자들이 좀처럼 돈을 쓰지 않으려고 한다”며 “여기에 중국 e커머스 진출이 잇따르면서 업체 간 출혈경쟁은 심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부 교수는 “한국은 2020년 이후 인구가 늘지 않고 있다. 인구 구조적으로 성장할 수 없는 내수시장 한계에 부딪힌 상황”이라며 “자본력이 탄탄하거나 e커머스 중에서도 쿠팡·네이버처럼 구독경제가 제대로 구현된 곳 등 대형 플랫폼만 살아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성희 기자 mong2@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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