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제안으로 함께 떠난 전북 고창 여행. 연고가 없다고 여겼던 그곳에서 화자 ‘경주’는 자신의 출생과 가족의 비밀을 마주한다. 외주 프로덕션 PD인 친구의 부탁으로 단역배우로 활동하는 어머니를 주인공으로 한 TV 다큐멘터리를 촬영하게 된 경주. 그는 딸이 아닌 작가로서, 어머니가 아닌 출연자 김순효씨와 문답을 주고받는다. 어머니는 카메라 앞에서 지난 세월을 풀어놓는다.
“얼라를 업고 손에 봉다리 하나를 들고 종종종 뛰어오데요. 봉다리를 내밀길래 받아 열어보이…. 감이 네 개 드른 기라요. 등에 업힌 얼라가 내한테 손을 뻗데요. 감을 내한테로 더내미는 기라요. 감을 받아주이, 그 조막만 한 손으로 좋다고 손뼉을 치데요. (…) 흙길을 혼자 타박타박 걸어가믄서 그 감을 묵었지예. 애들 아부지가 딴살림 차린 여자한테서 얻은 감을.”(177∼178쪽)
평생 노름판을 기웃댄 남편이 외도해 낳은 아기에게 대봉감을 받아든 어머니는, 훗날 아이의 친모가 사망하자 그 아이를 자신의 품에 받아들인다. 슬픔과 고통은 혼자만의 것으로 두고 경주를 키워낸 어머니. 자신만 알던 과거사를 카메라 앞에서 담담히 풀어내는 어머니를 보며 경주는 새로운 길을 선택할 용기를 얻는다.
“얼라를 업고 손에 봉다리 하나를 들고 종종종 뛰어오데요. 봉다리를 내밀길래 받아 열어보이…. 감이 네 개 드른 기라요. 등에 업힌 얼라가 내한테 손을 뻗데요. 감을 내한테로 더내미는 기라요. 감을 받아주이, 그 조막만 한 손으로 좋다고 손뼉을 치데요. (…) 흙길을 혼자 타박타박 걸어가믄서 그 감을 묵었지예. 애들 아부지가 딴살림 차린 여자한테서 얻은 감을.”(177∼178쪽)
지난달 25일 서울 용산구 세계일보 사옥을 찾은 소설가 이수정이 첫 장편소설 ‘단역배우 김순효씨’를 든 채 포즈를 취했다. 그는 “거창한 목표 없이, 그저 계속 써나가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했다. 이재문 기자 |
평생 노름판을 기웃댄 남편이 외도해 낳은 아기에게 대봉감을 받아든 어머니는, 훗날 아이의 친모가 사망하자 그 아이를 자신의 품에 받아들인다. 슬픔과 고통은 혼자만의 것으로 두고 경주를 키워낸 어머니. 자신만 알던 과거사를 카메라 앞에서 담담히 풀어내는 어머니를 보며 경주는 새로운 길을 선택할 용기를 얻는다.
1967년 부산에서 태어난 이수정(57)은 2024년 영남일보, 2025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연이어 당선되며 소설가로 등단했다. 그 사이 고창신재효문학상을 품에 안았고, 그 수상작인 ‘단역배우 김순효 씨’를 지난달 출간했다. 첫 장편을 막 세상에 내보낸 작가를 지난달 25일 만나 인터뷰했다.
“신문방송학과 졸업 후 사보기자로 일하다 2000년 유학생의 아내로 미국에 건너가 죽 살았어요. 할 수 있는 일이 번역밖에 없더라고요. 논픽션을 한 두권씩 작업하다 보니 50권이나 옮겼더군요.”
언제나 글과 문장 가까이 살았지만, 젊은 시절부터 문학의 길에 뜻을 품어온 건 아니었다. 소설가의 길을 꿈꾼 건 중년 이후의 일이고, 그조차 우연의 작용이 컸다. 우연히 2016년 재외동포문학상 공고를 보고 단편소설을 출품해 우수상에 당선된 것.
“여태껏 읽어본 소설들에 기반해 ‘이런 게 소설이겠지’ 하는 마음으로 흉내 내듯 썼어요.” 작가를 자극한 건 ‘결말이 없다’는 심사평의 한 구절. “나는 결말을 썼는데, 왜 결말이 없다고 할까. 호기심이 생기더군요.”
작법서와 이론서를 읽기 시작했고, 미주 동포들을 위한 전문 소설가의 온라인 소설강의를 들으며 습작했다. 이웃들과 함께 고전 100권을 함께 읽는 북클럽을 수년간 운영하며 숙성의 시간을 보냈다. 이디스 워튼, 어니스트 헤밍웨이…. 좋은 소설들을 읽으며 ‘이건 왜 좋은 소설인가’를 고민하던 그는 2022년 재외동포문학상 대상을 탔고, 곧 소설가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 작품은 어떻게 태어났는지.
“실제 단역배우로 활동하는 친정 어머니와의 고창행이 재료가 됐다. 삶에 지치고 마음이 힘들 때 정처없이 어디론가 떠나고 싶지 않나. 40년 전 내 어머니가 그런 마음으로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고창으로 향했다. 무작정 산을 찾아 올랐는데, 그곳이 하도 좋아 땅 한 조각을 사셨다고 한다. 맹지인 줄도 모르고. 이 일이 계기가 되어 고창서 어머니의 인생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다. 상대를 향해서는 직접 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아이러니하게도 카메라를 향해 더 진솔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카메라라는 매개체를 동원한 이유다.”
―미국에서 25년을 지냈는데, 작품의 색채는 더없이 한국적이다.
“‘낡은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풀었다’는 평가를 들었는데, 나를 설명하기에 적합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내 어머니 세대에 대해 많이 생각한다. 소멸해 가는 세대이지만 이대로 사라져서는 안 될 이야기가 많이 남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앞으로의 모든 작품이 그렇지는 않을 거다. 미국에 사는 미국 사람들의 일상을 다룬 소설도 구상하고 있다.”
―소설가로서 하루의 일과는.
“아들이 잠든 밤 11시부터 새벽 2시까지 3시간을 바짝 집중해서 쓰는 편이다. 아들이 3세 때 자폐 스펙트럼 진단을 받고 참 먼 길을 왔다. 그 아이가 커서 올해 미국 음대에 입학하게 됐다. 물론 대학에 가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좋은 삶을 살 수 있지만, 아이가 가능성을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기쁘다. 나 역시 최근 작가로서 가능성을 인정받고 있지 않나. 아이와 나 모두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는 기쁨과 부담감을 동시에 느끼고 있다.”
―작가로서 향후 계획은.
“맥없는 말이지만, 계획이랄 것이 없다. 거창한 목표도 없다. 그저 계속 쓰고 싶다. 50살이 넘어 문학적 소양을 발견했다. 너무 힘든데 너무 재미있고, 내 글이 책으로 나오는 것이 너무 보람차다. 내가 만드는 인물이 정말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아서, 내가 작은 우주들을 만드는 듯한 뿌듯함이 크다. 써놓은 단편들을 묶어 소설집을 발간하는 것이 소망이다. 그러나 가장 큰 열정은 장편소설에 있다. 언젠가는 발달장애 아들을 기른 경험을 승화한 장편을 쓰고 싶다. 천천히 숙성하며 기획하고 있다. 소설가로서의 앞날이 불안하기도 하지만, 겸손하게 공부하며 쓰다 보면 배우는 바가 있을 것이다.”
이규희 기자 lkh@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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