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한국 산업이 총체적 위기에 놓였다. 원자재 가격 급등과 글로벌 공급망 재편, 미·중 무역 갈등이 겹쳐 경영 환경은 갈수록 악화하고 있다. 위기를 돌파할 열쇠는 결국 기술이다. 기술은 기업의 생명줄이자 존재 가치다. 기업들이 최고기술책임자(CTO)의 역할을 더욱 강조하는 배경도 여기에 있다. CTO는 단순히 신기술을 개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변화하는 시장을 분석해 기업의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전략가로 자리매김했다. 아시아경제는 국내 주요 기업들의 CTO를 만나 각 산업이 주목하는 핵심 기술과 차별화 전략을 들어봤다. 주요 기업의 기술 전략을 통해 우리 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고 미래 가치를 창출할 방안을 모색한다.
서장철 LS일렉트릭 CTO가 서울 용산 LS용산타워에서 아시아경제와 인터뷰 하고 있다. 조용준 기자 |
2010년대 초 글로벌 전력 인프라 시장의 중심은 중국이었다. 미국은 기기 교체 수요 말고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LS일렉트릭은 이때부터 다양한 제품군에서 미국 시장을 겨냥한 UL(Underwriters Laboratories) 인증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통상 글로벌 전력기기 시장에선 IEC(International Electrotechnical Commission) 규격이 통용되는데, 미국 시장 진입을 위해선 현지 유통업체나 소비자가 필수로 요구하는 UL 인증을 반드시 받아야 한다. UL 인증은 미국의 민간 안전 인증기관인 UL이 시험과 평가를 거쳐 부여하며 전기·전자 제품이 화재나 감전 등 안전 문제없이 사용될 수 있다는 걸 보증한다.
특히 북미 시장에선 UL 인증이 없으면 유통 자체가 어렵기 때문에 실질적인 '시장 진입권'을 의미한다. UL 인증은 통상 규격보다 절연 등에 있어 고강도의 안전 기준을 요구한다. 시장에선 기존 생산 품목에 UL 인증을 새로 받으려면 신제품 개발에 버금가는 노력이 투입돼야 한다고 이야기할 정도다. LS일렉트릭은 미국 전력 인프라 시장이 관심을 받기 전부터 북미 시장 진입을 위한 인증에 매달렸고 10년이 흘러서는 국내 유일의 배전반 UL 인증 보유 기업으로 미국 시장에 안착할 수 있게 됐다.
서장철 LS일렉트릭 CTO가 서울 용산 LS용산타워에서 아시아경제와 인터뷰 하고 있다. 조용준 기자 |
서장철 LS일렉트릭 최고기술책임자(CTO·상무)는 최근 서울 LS용산타워에서 진행한 아시아경제와의 인터뷰에서 "2010년대 초부터 미국 시장의 성장 가능성을 내다보고 전사적으로 UL 인증 확보에 매달렸다"며 "안정적으로 북미 시장에 진입하는 발판이 됐다"고 밝혔다.
LS일렉트릭은 지난해 북미 시장에서 1조3000억원 규모의 계약을 수주하면서 미국 빅테크(대형 정보기술 기업)를 중심으로 꾸준히 시장 점유율을 늘리고 있다. 지난해 '데이터센터 프로젝트'로 900억원을 웃도는 계약을 따낸 데 이어 올해 3월에는 1625억원 상당의 판매·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LS일렉트릭은 오래전부터 전체 매출의 5% 이상을 연구개발(R&D)에 고정 투입하고 있다. 이 회사의 지난해 매출은 4조5518억원으로, 국내 '전력 3사' 중에서도 최대를 기록했다. 5%라는 수치를 대입하면 LS일렉트릭이 R&D에 투입하는 예산은 연간 최소 2280억원에 달한다.
서 CTO는 미래 시장을 선도하는 R&D 방향성으로 단기·중기·장기 등 3가지 축을 제시했다. 그는 "LS일렉트릭이 퍼스트 무브(First Move·선제 대응)로 나선 초전도 전력 시스템이나 반도체 변압기는 글로벌 빅4 기업들도 보유하지 못한 제품군"이라며 "훗날 전력 시장의 게임체인저가 될 것으로 판단하고 최초로 실증도 하고 표준·규격 등을 만들고 있다"고 밝혔다.
그가 주목하는 기술은 고효율 전력 변환이다. 차세대 에너지 산업의 핵심기술로 꼽힌다. 전력 밀도를 증가시키면서도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기술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고효율 전력 모듈의 개선 ▲차세대 반도체 기술의 상용화 ▲친환경 에너지 솔루션의 확장 등 향후 5년간 로드맵이 구축돼 있다. 서 CTO는 "국내 데이터센터와도 '구체적인 대화'가 오가고 있다"고 했다.
LS일렉트릭의 Susol DC 기중차단기 및 개폐기. LS일렉트릭 제공 |
최근 전력 인프라 '붐'은 송전에서 배전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게 서 CTO의 설명이다. 발전소에서 데이터센터로 전력을 끌어오기 위해 초고압 변압기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었다면 다음 차례는 배전반이라는 것이다. 전기를 끌어왔다면 이젠 그 전력을 어디에, 얼마나, 어떻게 나눠 쓸지 배분하는 이치와 같다. 배전 시장은 통상 송전 시장보다 2~3배 크다. 인공지능(AI) 산업 발전과 데이터센터 급증으로 이제 그 규모가 송전 대비 6배 이상 커질 것으로 점쳐진다.
LS일렉트릭은 경쟁사와 비교해 '배전반' 제품군에서 강점을 갖고 있다. 서 CTO는 "배전반이 결합된 시장이 가장 큰데, 일본 등 다른 기업들이 따라오려면 4~5년 이상 소요될 것"이라며 "직류(DC) 차단기·개폐기 등은 글로벌 시장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경쟁력이 막강하다"고 자신했다. 이어 "미국 같은 대규모 시장은 노후화 이슈 때 송전 물량이 몰리지만 이 사이클이 지나면 결국 수요가 출렁인다"며 "시장 흐름에 맞춘 송전 공략과 강점을 가진 배전 기술력으로 시장 변동성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LS일렉트릭은 구체적으로 '2030년 매출 10조원'을 목표로 제시했다. 서 CTO는 "송전과 배전, 두 가지 슈퍼 사이클을 타고 2030년까지 매출 10조원을 기록하겠다는 게 목표"라고 설명했다.
'환경 규제'가 강한 유럽 시장도 공략 중이다. 에너지저장시스템(ESS)에 강점을 가진 유럽 기업들이 많지만 현재 직류 차단기·개폐기 등 공급자는 LS일렉트릭이 유일하다. 미국 시장에 전력 인프라 호황기를 가져온 '노후 전력망 교체 수요'가 조만간 유럽에서도 나타날 것으로 보고 대비에 착수했다. 서 CTO는 "새로운 규제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기술 개발은 시장 진입에 직결되는 요인"이라며 "소재 변환에 있어서도 변압기는 식물유로 바꿔 유럽과 국내에 납품 중이고 몰드 변압기를 비롯한 친환경 변압기도 1위를 지키고 있다"고 했다.
서장철 LS일렉트릭 CTO가 서울 용산 LS용산타워에서 아시아경제와 인터뷰 하고 있다. 조용준 기자 |
서장철 CTO는 기술 개발에 더해 글로벌 시장에서 신뢰도를 구축한 배경으로 'K컬처'를 꼽았다. '고객이 부르면 어디든지 달려간다'는 마인드로 시장을 공략했고 입소문을 타면서 LS일렉트릭을 찾는 고객사가 점차 늘었다는 이야기다.
그는 산업도 '국가대항전'의 시대라고 강조했다. 미국·중국 등 기업들이 정부 지원을 발판 삼아 시장을 공략하는 만큼 우리 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정부의 역할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이젠 기업들 홀로 싸울 수 없다. 정책을 빠르게 집행하는 속도감과 이를 뒷받침하는 예산 실행력이 필요하다"며 "정부와 기업이 슬기롭게 협력하는 정책을 기대한다"고 했다.
장희준 기자 jun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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