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윤찬과 파비앵 가벨이 지휘하는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통영국제음악재단 제공] |
[헤럴드경제(빈·통영)=고승희 기자] #1. 밤하늘을 유유히 가르는 은하수처럼 한 음 한 음이 맑고 영롱하게 이어진다. 고개를 들어 플루트 연주자를 바라보더니 그의 소리를 더 돋보이게 하려는듯 피아노는 한 발 물러선다. 이내 만들어지는 따뜻한 서정의 순간들. 목관 악기들과 주고 받는 파트가 끝이 나자 그는 아주 여린 소리로 작은 별들을 흩뿌려 밤하늘(2악장)로 보낸다. 이내 심장이 요동치는 화려한 속주(3악장)가 시작되면, 관객은 그의 음악세계로 속절없이 빠져 길을 잃고 만다. 지난 1월 마린 알솝이 지휘하는 비엔나국립방송교향악단과 임윤찬이 연주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이다.
#2. 단단하고 묵직한 8마디의 시작. 이날의 터치는 ‘곡의 방향성’을 결정했다. 본연의 음색을 고스란히 드러내면서도 장엄한 엄숙미가 실린 울림의 감흥이 사라지기도 전에 그의 손은 양보 없는 오케스트라의 떼창을 비집고 나온다. 오케스트라 사이로 새어나는 다양한 소리의 향연. 한 음 한 음이 명징하게 울려 제자리를 찾고, 그러면서도 오른손은 화려한 순간들을 만들며 무거움의 깊이를 찬란한 태양처럼 어루만졌다. 임윤찬과 파비앵 가벨이 지휘하는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이었다.
임윤찬과 파비앵 가벨이 지휘하는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통영국제음악재단 제공] |
임윤찬(21)이 다시 한국 무대에 섰다. 그의 ‘음악적 고향’인 통영에서다. 통영은 임윤찬에게 특별한 도시다. 그는 2019년 열다섯 살에 통영국제음악재단이 주관하는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에서 역대 최연소 우승자로 이름을 올린 이후, 2022년 미국 밴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세계가 주목하는 피아니스트가 됐다.
통영국제음악제의 상주음악가로 돌아온 임윤찬에 대해 진은숙 예술감독은 “임윤찬에게 통영은 제2의 고향”이라며 “친정에 오는 듯한 느낌을 가지고 기꺼이 연주하겠다고 해서 함께 하게 됐다”고 말했다. 임윤찬이 통영에 입성하자 음악제는 엄청난 속도의 티켓 판매율을 달성했다. 통영국제음악제에 따르면 임윤찬의 단독 리사이틀은 티켓 오픈 이후 58초, 개막 공연은 60초 만에 전석 매진됐다. 김소현 통영국제음악재단 본부장은 “임윤찬의 인기와 함께 개막 첫주 공연이 순식간에 팔리며 다른 공연의 티켓 판매까지 동반 상승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통영국제음악제 개막공연에서 그가 선택한 곡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라흐마니노프는 임윤찬에게도 빼놓을 수 없는 작곡가다. 밴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 결선 당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연주하며 단숨에 존재를 증명했다. 이 연주는 현재까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본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 영상(유튜브 기준)이다.
지난 1월 마린 알솝이 지휘하는 비엔나국립방송교향악단과 임윤찬의 협연/고승희 기자 |
피아노 협주곡 2번은 라흐마니노프가 교향곡 1번의 초연 실패 후 극심한 우울증과 신경쇠약 증세로 3년간의 작곡 절필기를 거친 이후 태어난 곡이다. 1901년 11월 라흐마니노프의 연주로 모스크바에서 초연됐다.
임윤찬의 라흐마니노프 ‘도장 깨기’는 무대마다 새로운 순간을 만들어낸다. 불과 두 달 차이였지만, 빈과 통영의 연주는 놀랍도록 다른 빛깔, 다른 해석, 다른 타건으로 이어졌다. 두 연주는 오케스트라와의 조화로운 소리를 만들기 위한 이성적 선택과 피아니스트로 발산할 예술성의 극치를 끌어내는 창발적 아이디어를 두루 고려해 연주됐다.
밴 클라이번 콩쿠르를 지휘했던 마린 알솝과의 재회 무대에선 두 사람의 서로를 향한 신뢰와 애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임윤찬이 기존보단 다소 빠른 템포의 여덟 마디를 시작한 것은 일종의 빌드업이었다. 강렬한 도입을 선택하기 보다 이후 더 큰 강렬함을 만들기 위해 오케스트라와 호흡을 맞췄다. 1악장에서 그는 오케스트라의 멜로디에 어우러지는 반주 역할을 충실히 하려는듯 의도적으로 소리를 줄였다. 귓가를 간지럽히듯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를 다양한 색채로 들려줬다. 오케스트라와 피아노는 서로가 서로를 돋보이게 하는 연주로 1악장을 마무리했다.
반면 통영에서의 1악장은 보다 단단한 소리로 도입부의 강렬한 존재감을 살렸다. 오케스트라의 압도적인 소리를 가르고 나오는 임윤찬의 묵직한 타건, 무거움을 덜어내는 음과 음 사이의 밀고 당기기, 찬연한 색채를 입은 오른손의 기교가 귀를 홀렸다.
지난 1월 마린 알솝이 지휘하는 비엔나국립방송교향악단과 임윤찬의 협연/고승희 기자 |
마린 알솝과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악장이 서정의 극치였다면, 통영에서의 2악장은 몽환의 극치였다.
마린 알솝은 임윤찬과 눈을 맞추며 지휘를 이어갔고, 2악장에 접어들어선 결정적인 순간마다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낮췄다. 입에 손가락을 대고 단원들의 소리를 조율하며 임윤찬의 연주를 완전한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소년 피아니스트의 성장을 지켜본 마에스트라의 깊은 애정이 연주 내내 드러났다. 오케스트라와의 아름다운 대화를 거쳐 임윤찬의 낭만이 몽환의 숲을 거닐자 ‘음악의 도시’ 빈의 청중은 물론 마인 알솝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통영에서의 2악장에서 임윤찬은 플루트, 클라리넷 연주자와 시선을 주고 받으며 피아노를 시작했다. 묵직하게 내리누르는 중에도 금세 힘을 풀어내듯 미끄러지듯 낭만을 만들고, 음울로 빠져들듯 하다가도 다시 마음의 안정을 찾은 듯한 서정으로 마무리했다.
초고난도의 연주가 이어지는 3악장은 화려함으로 무장한다. 빈에서의 연주가 날렵하고 격렬한 질주로 무장했다면, 통영에선 묵직하고 강렬하면서도 생생한 리듬감을 살려냈다. 임윤찬이 만들어내는 찬란한 음색과 화려한 테크닉, 숨막힐듯 이어지는 후반부의 속주는 다시 마주하지 못할 격정적 포효로 마침표를 찍는다. 두 연주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오케스트라의 음량이었다. 마린 알솝과 비엔나국립방송교향악단은 시종 피아노를 배려한 반면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는 웅장하고 씩씩한 소리로 거침없이 밀고 들어왔다. 오케스트라의 음향, 피아노의 밀당 차이가 임윤찬의 해석 방향성을 달리 했다.
지난 1월 마린 알솝이 지휘하는 비엔나국립방송교향악단과 임윤찬의 협연/고승희 기자 |
짧은 탄식조차 가로막는 압도적 피아노 성찬이 막을 내리면 어김없이 함성이 쏟아진다. 통영에선 비명 소리에 가까운 열광과 기립 박수가 이어졌고, 빈에서는 희끗한 백발의 노관객들의 ‘브라보’와 기립박수가 끊이지 않았다.
‘클래식계의 슈퍼스타’ 임윤찬이 가는 곳엔 팬덤 행렬이 이어진다. 국내외 연주 일정엔 피켓팅(피 튀기는 티켓팅)에 성공한 한국 팬들이 따라다닌다. 비엔나 공연에서도 나이 지긋한 현지 관객들과 함께 한국에서 그를 보기 위해 날아온 관객들이 적잖았다. 당시 현장에서 만난 김영민(35) 씨는 “휴가차 유럽 유행을 하던 중 비엔나에서 공연한다는 소식을 듣고 티켓팅한 뒤 급히 일정을 변경해 이곳으로 왔다”며 “한국에선 예매가 너무 힘들었는데 운이 좋아 이번엔 볼 수 있었다”고 했다. 공연은 1월 23일이었으나 한달여 전인 12월 9일 일반 예매를 오픈, 순식간에 주요 자리 티켓이 모조리 팔려나갔다. 예매 오픈 5일 후엔 공연장 3층의 가장 뒷좌석만 남았고, 매진을 기록한 뒤 극장 측은 합창석 사이드로 급히 좌석을 만들어 55유로(한화 8만 7567원)에 판매하기도 했다.
임윤찬과 파비앵 가벨이 지휘하는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통영국제음악재단 제공] |
‘아시아의 잘츠부르크’ 페스티벌로 불리는 통영국제음악제도 올해는 새싹 관객이 많았다. 임윤찬을 보기 위해 장장 4~5시간을 운전해 달려온 팬들이다. 이들은 공연장 로비의 대형 화면에 임윤찬이 등장할 때마다 휴대폰 카메라를 켜고 사진으로 담으려는 열성적 ‘팬심’을 드러냈다. 개막 공연 이후 주차장에서 만난 오모 씨는 “임윤찬 피아니스트의 공연을 보기 위해 처음으로 통영에 왔다”며 “당일치기로 오게 된 공연이라 통영을 즐길 여유는 없었지만 압도적인 연주를 본 것만으로도 왕복 10시간을 투자한 보람이 있었다”며 만족해했다. 이날 공연엔 문재인 전 대통령 부부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