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 시기가 주목받는 가운데, 지난 11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깃발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김영원 기자 forever@hani.co.kr |
류영재 | 의정부지방법원 남양주지원 판사
이럴 줄은 몰랐다. 이 칼럼을 쓸 때에는 이미 탄핵심판이 선고되었을 것이라는 점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하긴, 의심하지 않았던 일들은 많았다. 비상계엄이 선포되었을 때 적어도 서울·수도권에 있었던 모든 국회의원들은 여야 가릴 것 없이 한자리에 모여 계엄 해제를 의결하리라 믿었다. 계엄 해제 후에는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가 단번에 의결되리라고 믿었다. 경찰, 검찰,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가 서로 수사하겠다고 경쟁하던 시기에는 상설특검이든 특검법에 의한 특검이든 특검이 임명되어 수사권 관련 쟁점들이 정리될 것이라고 믿었다. 체포영장이 발부되었을 때에는 거부 없이 집행되리라고 믿었고, 구속영장이 발부되었을 때에도 법원과 판사는 무탈하리라고 믿었다. 늦어도 권한쟁의심판 결과가 나온 이후에는 마은혁 헌법재판관이 임명될 것이라고 믿었다. 헌법과 법률에 비추어 볼 때 그 외의 결과를 도저히 예측할 수 없었기에 이 모든 것들을 추호도 의심 없이 믿었고, 이 믿음은 단 한번도 이뤄지지 않았다.
허탈한 마음으로 미리 예매해두었던 영화 ‘콘클라베’를 보았다. 콘클라베는 교황 선종 시 선거권을 가진 추기경들이 시스티나 성당에 모여 비공개로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는 제도다. 영화 속 추기경들은 지역, 언어, 가치관 및 방향성 등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고 선거운동을 벌인다. 권모술수와 정치적 타협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성스러운 공간에서 전혀 성스럽지 않은 선거 과정을 다루던 영화는 결국 강력한 한방을 위해 개연성을 버리고 판타지로 나아가는데, 이때 딱 한번 신이 개입했다고 애써 이해해줄 법도 하다. 어쨌든 콘클라베 아닌가. 사실 작금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결말보다도 이 영화를 더 판타지로 만드는 요소는 합리성과 양심을 버리지 않은 추기경들 그 자체다. 무려 교황이 될 수 있는 유력 후보자로 꼽히는 추기경들이 드러나는 비리에 백이면 백 승복한다. 비리 사실이 제대로 밝혀진 것도 아니고 징치된 것도 아닌데 스스로 교황이 될 수 없음을 인정한다. 지지자들도 기적의 논리로 비리를 정당화하거나 눙치거나 진영 결집을 시도하는 대신 칼같이 투표 대상을 바꾼다. 영화를 함께 본 남편은 어차피 저 비리를 안고 교황으로 선출되어봤자 이후 시스티나 성당 밖으로 비리가 새어나갈 것이고 그때는 가톨릭 전부가 공멸하게 되므로 추기경들의 선택이 합리적이라고 평가했지만, 글쎄다. 우리는 지금 두 눈으로 목격하고 있지 않은가. 자명한 위헌·위법 앞에서 이를 정당화하고, 헌정질서의 공멸이 예상되어도 진영 이익 챙기기에 급급한 위정자들을.
2018년 대법원은 1972년 10월17일 선포된 비상계엄에 대해 이렇게 판단했다(2016도1397 판결).
국가긴급권을 행사하는 대통령의 결단을 존중하더라도, 국가긴급권의 행사는 헌법과 법률상의 요건과 한계에 부합하여야 하고, 법원은 이를 사법심사 할 수 있다. 비상계엄은 전쟁 또는 전쟁에 준하는 사변으로 국가의 존립이나 헌법의 유지에 위해가 될 만큼 극도로 사회질서가 혼란해진 상황이 현실적으로 발생하여 경찰력만으로는 도저히 비상사태의 수습이 불가능하고 군 병력을 동원하여 그러한 상황에 이른 직접적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게 된 때에만 선포될 수 있다. 나아가 ‘일체의 정치활동 목적의 실내외 집회 및 시위, 정당한 이유 없는 직장 이탈이나 태업 행위, 유언비어 날조·유포 행위를 금지하고, 언론·출판·보도·방송은 사전 검열을 받아야 하며, 포고령 위반 행위는 처벌한다’는 계엄포고의 내용은 헌법상 보장되어야 할 국민의 기본권 인권을 침해하고 죄형법정주의에도 위배된다. 헌법과 법률에서 정한 발동 요건을 갖추지 못한 채 발령되었고, 내용도 헌법상 기본권을 침해하며 죄형법정주의에 위배되는 계엄포고는 위헌이고 위법하여 무효이다.
내가 그간 가졌던 믿음은 바로 저 판결을 비롯하여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헌정질서 아래 꾸준히 내려진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의 판단들을 근거로 한다. 국가는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최대한 보장할 의무를 지니고, 위정자들은 자신의 권한을 헌법과 법률에 부합하게 행사하며, 헌법재판소와 법원의 판단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단순한 믿음이다. 지금까진 판판이 깨져온 믿음이지만, 결국에는 그 믿음이 지켜질 것을 또 한번 믿으려 한다. 영화 콘클라베를 부러워하지 않을 수 있는 때가 반드시 오리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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