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patch=정태윤기자] 조훈현은 바둑으로 최고를 찍었다. 그래서 국수(國手)라 불린다. 배우 이병헌도 연기 국수라 할 수 있다.
이번엔 조훈현 국수에 빙의했다. 미세한 근육의 떨림과 관절의 움직임으로 모든 것을 표현했다. 가장 정적인 스포츠 속에서, 가장 격정적인 드라마를 완성했다.
그는 연기 칭찬에 "저는 그냥 잔치 국수"라고 받아치면서 "바둑과 연기는 비슷하다. '잘하려면 이걸 해야 된다'는 공식이 없다. 저도 그게 뭔지 알면, 그것만 되게 열심히 할 것 같다"고 토로했다.
99수를 잘 둬도 단 한 수를 잘못 놓으면 그르칠 수 있는 게 바둑이다. 연기도 그러하다. 매 작품 연기 칭송을 들어도, 고민하고 곱씹는 순간의 연속이다.
'디스패치'가 최근 이병헌을 만났다. 그의 연기 고민을 들었다.
◆ 바둑의 신
영화 '승부'(감독 김형주)는 바둑 레전드 조훈현과 그의 제자 이창호의 대결을 그린다. 조훈현이 제자와의 대결에서 패한 후, 다시 한번 정상에 도전하는 이야기다.
이병헌이 조훈현 국수를 재현했다. 조훈현은 지금도 현역에서 활동 중이다. 그만큼 자료가 방대했다. 신문, 다큐멘터리 등을 정독했다.
실제로 조훈현 국수를 만나 그때의 이야기를 생생히 듣기도 했다. 이병헌은 "그분의 버릇이나 겉모습, 생각을 듣고 그대로 옮기려 했다"고 말했다.
그가 조훈현을 만나 잡은 연기 키워드는 '매너'였다. 사실, 조훈현 국수는 바둑에서 말하는 예의와는 거리가 있는 인물이었다. 양반다리를 하고 누워서 바둑을 두기도 했다.
이병헌은 "조훈현 국수는 본인이 이길 것 같을 때 다리를 떤다. 흥얼거리거나 눕기도 한다"며 "상대를 자극하는 심리전이 재미있는 포인트였다"고 설명했다.
이어 "(조훈현이) 특히 당부한 건, '프로 바둑기사다운 손 모양으로 바둑돌을 놔달라'고 조언하셨다"며 "당장 바둑판을 사서 틈날 때마다 돌 두는 연습을 했다"고 말했다.
"조훈현 국수는 바둑알 밑면에 양면테이프가 붙어있는 느낌으로 둡니다. 그런 손놀림을 훈련했습니다. 돌 하나를 놨을 때의 포스와 울림이 얼마나 조훈현 국수처럼 느껴지느냐가 숙제였어요."
◆ 연기의 신
그 결과, 이병헌은 가장 정적인 스포츠에서 가장 역동적인 움직임을 만들어냈다. 큰 진폭을 작은 떨림으로 풀어냈다. 미세한 근육의 떨림까지 컨트롤했다.
이병헌은 "함께 먹고 자던 제자에게 졌다. 심지어 계속해서 도전해야 했다"며 "그 속내는 어떤 스포츠 경기를 하는 사람보다 가장 극단적인 상태였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겉으로는 정적으로 바둑돌 하나를 툭 놓습니다. 그러나 속은 아주 격정적인 상태인 거죠. 나만 생각하고 관객에게 그 감정을 안 보여주면 의미가 없잖아요. 그걸 표현하는 게 어려웠습니다."
그가 몇 번을 다시 찍은 장면도 있다. 조훈현 국수가 이창호 9단과 대결이 끝날 때쯤, 밖에서 담뱃갑을 구긴다. 더 이상 이길 방법이 없다는 복잡하고 묘한 속마음을 내비친 것.
"복잡다단한 마음을 표현해야 했습니다. 유독 테이크를 많이 갔어요. 며칠이고 마음에 밟혔죠. 감독님께 '다시 찍을 수 있냐'고 물어볼 정도로 욕심이 나는 시퀀스였습니다."
다시 봐도 만족스러운 장면도 있다. 이병헌은 "박찬욱 감독님의 연락을 받았다. 조훈현이 패배를 확신하고 '음… 안 되나'라고 혼잣말하는 부분이 좋았다더라. 제가 봐도 그 신은 잘한 것 같다"며 기분 좋게 웃었다.
◆ 청출어람을 당한 스승
독야청청하던 스승 조훈현. 그를 꺾은 제자 이창호. 스승이 칼이면, 제자는 방패다. 유아인이 돌부처 이창호를 연기했다. 공개 전부터 두 사람의 연기 승부를 예고했다.
이창호는 나이답지 않게 신중하고 끈덕진 플레이로 유명하다. 유아인은 그를 신중한 60대 노인처럼 완성했다. 현장에서도 캐릭터와 완벽히 동기화된 모습이었다.
이병헌은 "나이와 다르게 굉장히 과묵한 친구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후반부에는 '이 친구가 자기 캐릭터에 계속 빠져 있으려고 애를 쓰는구나' 느꼈다"고 떠올렸다.
'승부'는 청출어람을 당하는 스승의 마음을 대변하는 영화로 느껴진다. 조훈현이 이창호를 알아봤듯, 이병헌도 될성부른 떡잎을 만난 순간은 없었을까.
그는 "후배가 뭔가를 물어봐도, 답을 줄 수가 없다. '이걸 열심히 하면 연기가 좋아져'라고 할 수 있는 게 없다. 저도 아직 정답을 모른다"고 전했다.
"연기를 잘하는 보석 같은 동료들이 너무 많습니다. 작품을 보면서 '내가 저 연기를 할 수 있을까' 하는 순간들이 많아졌어요. 요즘은 누가 더 잘한다 못한다를 말할 수 없는 시대인 것 같습니다. 다 탐나게 각자의 부분을 잘하니까요."
◆ "관전 포인트는, 의외의 유머"
'승부'의 관전 포인트는, 의외의 코미디 아닐까. 조훈현의 이야기를 진지하게만 늘어놓지 않았다. 제자를 은근히 견제하는 스승을 보고 있노라면, 잔잔한 웃음이 픽픽 터져 나온다.
이병헌은 "실화이기 때문에 유머러스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며 "매번 진지하게 연기했다. 그런데 시사회 때 반응이 빵빵 터셔서 의외였다"고 전했다.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 때의 감정과 비슷합니다. 엄청 진지하고 슬픈 영화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제일 심각한 장면에서 웃으시더군요. '이거 잘못됐다' 싶었죠. 영화가 끝날 때까지 화장실에 들어가 숨어 있었습니다."
관객들이 영화관을 나오면서 내놓은 반응은 의외였다. 재미있다는 것. 그는 "작품 안에 빠져들면, 상황들이 그럴 법하지 않나. 감정 이입하고 공감하면서 웃음 포인트가 생기는 것 같다. '승부'도 그러하다"고 강조했다.
이병헌은 홀로 영화 홍보 일정을 소화 중이다. "외롭지 않냐"는 질문에, "그것이 승부니까"라는 극 중 대사로 받아쳤다. 그러면서 영화를 향한 애정 넘치는 마음도 덧붙였다.
"명대사가 많은 영화입니다. 그분들이 파란만장한 승부 속에서 겪은 후 한 말이잖아요. 때문에 명언일 수밖에 없겠죠. 어쩌면 우리가 너무 쉽게 내뱉었구나 싶기도 합니다. 정말 좋은 말이 많은 영화입니다. 바둑을 몰라도 충분히 재미있게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사진제공=바이포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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