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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6일 개다.
아침 일찍이 시장을 구경하였다. 여러 가지 물건이 예전처럼 풍부하게 나온 것은 좋으나 값이 너무 비싸고 대체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상업에 나설 필요가 있을까 생각되었다. 오늘날 조선사람의 할 일은 하나라도 물건을 더 생산하기를 애써야 할 것인데 이미 생산된 조그만 물건을 이리저리 움직여서 중간이득을 얻기만 위주하는 것 같으니 한심스러운 일이다. 그 때문에 교통기관은 더욱 붐비고 물가는 날로 오르는 것이 아닐까. 물론 작금의 물가고는 일본의 항복 후 패잔 일인의 무책임하고 악랄한 경제교란 내지 방임에 의한 것이겠지마는 조선사람의 모리배가 너무 준동하는 것도 한 가지 큰 원인일 것이다.
[조선은행권 발행고 8. 15 49억 원 9, 10 85억 원]
[해설 : 1945년 9월 28일자 〈매일신보〉 ”일본인 경제교란 목적으로 조선은행권 남발“ 기사에 조선은행권 발행고 추이가 8월 15일 49억 7514만여 원, 9월 8일(미군 진주일) 84억 6389만여 원으로 보도되었다.]
남산정에 강경석 군을 찾았으나 예기한 바와 같이 온 식구 모두 선산으로 이사가고 없었다.
길에서 임두승(林斗承) 씨(봉산정 214)를 만났다.
서점에 들러서 두세 가지 책과 기봉이 보일 그림책을 사 가지고 연합회 지부엘 들렀더니 김종대(金鍾大) 씨 기타 여러분이 반가이 맞아주었다.
경북중학에선 동맹휴학, 대구시보사에선 동맹파업, 모두들 신중히 생각할 문제가 아닐까 생각되었다. 일찍이 내가 대구고보 시절에 동맹휴학 했을 때 조함(趙咸) 선생의 질책하시던 편지가 생각난다.
도청 학무과에 들렀더니 의외로 김사엽(金思燁) 군이 시학관으로 와 있었다. 새 시대가 와서 새로운 희망과 의욕에 불타는 건 좋으나 언젠가 자택에서 유카타를 입고 일본 냄새를 풍기던 일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있다. 한때 학문에의 지향을 지니던 그들이 지나간 시대는 어찌했든 오늘날 와서 먼지가 케케히 앉은, 또 그러한 분위기 속의 관청에 나와서 가장 바쁜 것처럼 분주하는 걸 보면 그들의 닳아 없어진 지향이 가엾기도 하나 한편 생각해 보면 민족국가가 중대한 기로에 서 있는 오늘날인 만큼 유위유능한 학자일지라도 더러는 서재를 떠나서 새 건설에 참여함이 또한 좋은 일이리라.
김사엽 군이 영남 민립대학 건립에 대한 기초안을 보여주고 타일 고향에 와서 함께 일하자고 하였다. 향교 재산을 주축으로 하는 3천만원으로 문학부의 종합대학을 기획한다고. 경주쯤 하나 있음직한 일이다. 성공을 빈다.
거리에서 전에 경성제대 법과생이던 배 군을 만나서 학병동맹 경북지부에 들러달라기 가보았더니 두엇 아는 사람이 있어서 한동안 이야기를 교환하였다. 사회적인 활동도 물론 좋지만 학문 연구에 더 치중해서 그러한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하였다. 학문에의 지향이 사회적인 제약 때문에 좌절된 사람들인지라 너무나 엄청난 시련에 아직도 정신이 얼떨떨할 터이지만 한 번 그 잠자는 의욕에 불을 지르면 맹렬한 기세로 연소할 것이니 동맹에서 하루바삐 그러한 시책을 강구함이 좋겠다고 일러주었다.
박태원(朴泰遠)이 지었다는 학병의 노래의 제1절
허망의 논리 믿은 바 아니언만
정의와 사악 분간은 하면서도
손발을 묶고 아프게 매질하매
피눈물 뿌려 총자루 잡았다네
나는 이 노래를 마땅치 않다고 생각한다. 첫째 단가(團歌)의 첫 절이 변명으로 시작된 것이 달갑지 않다. 둘째 그 변명의 내용이 심히 굴욕적이다. 정의와 사악을 분간은 하면서도 매질에 못 이겨 끌려갔다는 건 피 끓는 청년학도로서 그리 버젓한 일이 아니다. 설사 학병 지원의 동기에 그러한 불순한 뜻이 있었다더라도 이걸 단가의 벽두에 내세우는 건 너무 고지식하다면 고지식하고 좀 얼빠진 일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 지극히 순진함이 좋다고도 볼 수 있지만 그보다도 사기(士氣)의 내면적 저상(沮喪)을 저어한다.
학병 지원의 동기는 여러 가지가 있었겠지만 내가 듣고 본 것만도 어떤 사람은 장차 우리들의 후배가 징병으로 일본 군문에 끌려갈 것이니 먼저 들어가서 그들의 길잡이가 되겠다는 사람도 있었고 또는 장래에 조선이 해방되는 날에 비(備)하여 군사적 훈련을 받아두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더러는 우리가 맨주먹으로 국사(國事)를 논한댔자 백년하청이니 아주 내 몸을 적중(敵中)에 던져서 조국 해방의 소지(素地)를 배양하는 한편 기회가 있으면 그들에게 총부리를 돌려 세울 수도 있는 것이고 하다 못하면 연합군 측으로 도망할 기회라도 노리겠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러한 모든 의도가 다 본질적으로 좋은 것이면서도 그때 학병으로 출진한다는 것이 가장 단적으로 일본의 군국주의 세력에 공명 가담하는 결과가 되고 그로 인하여 파생하는 대내적 대외적의 여러 가지 사회적 영향 – 일본의 군국이 노리는 성과에 비기어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거기엔 지순한 청년들의 열렬한 의도가 있었다. 이걸 단순히 자기변호로만 보기엔 당시의 사태가 너무나 심각하고 절박하였던 것이다.
물론 나가는 것이 의(義) 아닌 줄도 알고 또 가기도 싫지만 모진 채찍에 못 이겨 나간 사람들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보다도 더 훌륭한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동기가 또한 많았는데 하필 사내답지 못한 치욕적인 이유를 첫머리에 내세울 것이 무얼까. 도대체 단가의 초두에서부터 구구한 변명의 태도를 보이는 것은 너무나 소극적이고 궁한 노릇이 아닐까. 학병 제씨의 재고를 촉하는 바이다. 그들이 진심으로 반겨주어서 오랜만에 가족적 분위기에 싸인 단체를 찾은 것 같았다.
[해설 : 1943-44년 강압적 학병 지원 사태는 조선의 엘리트 청년집단에게 큰 트라우마를 안겨주었고 필자의 행로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같은 사태 앞에서 같은 고민을 하던 학병출신자들에게 필자가 특별한 유대감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다리목까지 걸어나와서 한동안 트럭을 기다리다가 가까스로 얻어 타고 하양까지 와서 내렸다. 동행 박수득 군은 영천읍으로 직행하고.
하양서 정경주(鄭璟柱) 씨를 찾았더니 그가 수십년래로 하던 운송점 관계에 있어서 동업 자 노다(野田) 아무개의 취한 태도로 보아 여기서도 일본인의 무사려 몰인정한 일례를 보았다. 동강동에서부터 어두워 오는 것을 월성동에 들러서 시천(矢川)할머니 뵙고 집에 오니 많이 저물었었다. 신녕 김 이사와 도기동 이선호(李先鎬) 군이 찾아와서 장시간 기다리다 갔다 하고 저녁에는 김사영(金士永) 씨 김경환(金景煥) 군이 놀러 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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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7일 흐리고 무덥다.
학교의 강연회는 오전 11시로부터 오후 2시까지 계속되어 목이 아프도록 지껄였다. 그래도 고향의 고구 친지가 일당에 회합하여 열심히 또 종시 정숙한 태도로 들어줌에는 고된 줄도 몰랐었다. 이야기하는 도중에 두 번 박수갈채가 있었다. 우미유카바(海行かば, 일본 해군가) 노래가 심히 흉하다는 것과 이런 노래를 아침저녁으로 부르니 그 나라가 망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는 것, 또 공산당의 8시간 노동제 운운은 원리로는 대단히 좋고 또 [노동자의 심신을 파괴하도록 혹사하는] 일부 공장에선 절박한 문제이지만 일반으로 본다면 자본주의가 기형적으로 발달하고 봉건적 잔재가 아직도 지양 청산되지 않은 후진국가에 있어선 그러한 공식적인 테제에 구애됨이 없이 민족의 총 역량을 집중하여 될수록 국가 총체로서의 부(富의 증산에 모든 심력을 있는 대로 경주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것을 강조한 때였다.
연제: 조선 민족의 현재와 장래
강연이 끝난 후에 미군정의 기간에 대해서 질문이 있기에 너무 조급하게 독립만을 맹목적으로 추구 염원할 것 없이 우리는 여기 나온 선진국 미군을 가정교사 앉힌 걸로 생각하고 민족의 실력을 함양해서 타일 문자 그대로 홀로 선다는 독립을 완미하게 이루어보자고 제언하였다. 그리고 다음에 38도 남북 분단에 관한 질문이 있었으나 이것은 세계 문제의 일환으로 해결될 것이라 용이한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 민족의 가장 불행한 현상이니 삼천만의 여론을 일으키고 이걸 연합국 측에 반영시키도록 해야겠다고 대답하였다.
오늘 출발하려던 것이 강연회가 의외로 오래 끌어서 못 떠나고 책궤 정리를 하였다. 오후에 이선호 권오영(權五英) 양군이 찾아왔었다. 밤에는 김사영 선생을 찾았다.
김기협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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