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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내 여자” 24살 연상男, 구애뒤 최악 뒤통수…그녀가 30년 수용소 갇힌 이유[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카미유 클로델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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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델편 150. 카미유 클로델 & 오귀스트 로댕
母탓에, 연인 탓에 가려진
수용소 30년 내내 갇힌 채, 잊힌 천재 이야기
헤럴드경제

카미유 클로델(일부 확대). 1883년경, [Cesar·화질 일부 복원(Plombelec)]



편집자 주
후암동 미술관은 무한한 디지털 공간에 걸맞은 초장편 미술 스토리텔링 연재물의 ‘원조 맛집’입니다. ■기자 구독■을 누르시면 매 주말 풍성한 예술 이야기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기사는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쓰였습니다.

“그가 날 죽이려고 한다”
그녀는 왜 이런 주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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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까미유 끌로델(Camille Claude·1989), 브루노 누이땅 감독, 이자벨 아자니 주연 [트레일러 캡처]



“로댕, 이 악마 같은 놈!”

카미유 클로델이 발작하며 소리쳤다. 공들여 빚던 조각의 얼굴을 후려쳤다. 덩어리에 달린 귀만 뭉개졌을 뿐, 아직 형태는 그대로였다. 부아가 치민 카미유는 이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날뛰듯 지르밟았다. 수염 맺힌 남자 형상의 작품은 그제야 묵사발이 났다. 광기에 찬 카미유는 몇 번이고 이렇게 제 작품을 깨부쉈다. 그녀 말곤 아무도 없는 공방에서, 하루종일. 그렇게 박살 낸 조각상이 한 수레 급이었다.

“카미유, 제발 그만해!”

종종 찾아온 지인이 이 터무니없는 짓거리를 말리려고 하면, 카미유는 같은 말만 끝없이 반복했다. “로댕, 그 나쁜 자식이 내 예술을 또 훔쳐가려고 한다니까!” 로댕은 한참 전부터 네 작업실에 오지 않았다는 말 따위는 기를 쓰고 무시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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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까미유 끌로델(Camille Claude·1989), 브루노 누이땅 감독, 이자벨 아자니 주연 [트레일러 캡처]



카미유는 이미 동네에선 미치광이로 불리고 있었다.

그럴 법도 했다. 틈만 나면 아무나 붙잡고선 “로댕의 사주를 받은 이가 쫓아오니 구해달라”며 울거나, 술을 퍼마시곤 “로댕을 피해 숨어있어야 한다”며 쪽방에서 겨울밤을 나곤 했으니까. 이 또한 모두, 딱히 근거가 있는 말은 아니었다. 이때 카미유는 고작 이십대 후반이었다.

카미유는 태어날 때부터 망상에 젖은 광인이었을까.

아니었다. 카미유는 외려 눈부신 재능을 안고 있었다. 이는 그녀보다 한 발짝 일찍 빛을 본 존재이자, 당장은 그녀가 지독하게 증오하는 그 사람. 오귀스트 로댕이 질투를 느낄 만큼의 예술성이었다. 불안정한 면이 없지는 않았다. 다만, 이 또한 외려 연료로 삼고 성취를 이어간 조각계 기대주였다.

그뿐인가.

톡 건드리면 투명한 액체가 흘러나올 만큼 깊은 눈, 매끈한 코와 우수에 찬 표정…. 거리에서 지나치면 한 번은 뒤를 돌아보게 만드는 외모와 분위기도 품고 있었다. 카미유는 이처럼 겉보기에는 신의 선물을 한 아름 안고 태어난 듯했다.

그랬던 카미유는 왜 천재 조각가로 칭송받지 못하고, 되레 이렇게 혼미해지고 말았는가.

무엇보다도 이토록 사무치게 로댕을 증오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카미유에게는 처절한 사정이 있었다. 정확히는, 몇 번의 참담한 ‘사고’가 있었다. 그건….

어머니의 깊은 증오
아들이 아니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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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유 클로델(14세 무렵)



카미유가 겪은 첫 사고는 그녀의 어머니였다.

한 인간이 타인, 심지어 어머니란 존재가 어떻게 자기 딸에게 사고가 될 수 있는가. 가능했다. 이는 거듭되는 학대와 무관심으로 이뤄낼 수 있는 일이었다.

사실 카미유의 부모는 그녀를 원하지 않았다.

카미유의 아버지는 1864년 프랑스 페르-앙-다드누아에서 그녀가 출생한 직후 괜히 거리를 쏘다녔다. 어머니 또한 본인이 낳은 핏덩이를 보곤 눈물만 펑펑 쏟았다. 들떠서, 설레서 그러지 않았다. 둘은 진심으로 실망했다. 이들은 당연히 아들을 볼 줄 알았다. 카미유가 태어나기 1년 전 세상에 나온, 겨우 보름 만에 죽었던 그 아이를 다시 안을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그런데 딸이 태어난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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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델 가족(오른쪽이 카미유), 1870



어머니가 특히나 카미유를 증오했다.

“너는 네 오빠를 잡아먹고 태어났다.” 그녀는 어린 카미유를 세워둔 채 잊을 만하면 이런 말을 했다. 카미유가 색연필들 쥐거나 진흙을 주물럭거리면 “왜 집안을 어지럽히려고 해!”라며 뺨을 갈기기도 했다. 어머니는 카미유에 이어 낳은 아들, 폴에게만 정성을 쏟았다. 그렇게 그녀는 존재와 말, 행동 자체로 카미유의 사고가 되고 만 것이었다.

다행히 아버지가 어린 카미유의 두 손에서 샘솟는 재능을 알아봤다.

그때부터는 그가 카미유를 감쌌다. 적성에 맞춰 예술도 접할 수 있도록 도왔다. 하지만 딸의 가슴은 해묵은 사건사고로 이미 구멍이 숭숭 난 상태였다. 원치 않게 마음에 흉을 진 카미유는 이쯤부터 결심했을지도 모른다. 언젠가 나에게 사랑을 듬뿍 줄 사람을 찾겠다고. 그를 반드시 내 것으로 만들고 말겠다고.

시인이 된 남자 앞에서
영원한 사랑을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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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리 맥케머린, 오귀스트 로댕, 1910, 캔버스에 유채, 99.8x81.1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드디어 찾았다!

카미유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내 반려, 내 사랑, 내 운명으로 삼기에 손색없는 사람이 눈앞에 있었다. 푸른 눈동자, 진한 인상, 탐스러운 턱수염…. 그가 로댕이었다. 카미유는 그가 위험한 사람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애정에 목이 말랐다. 그 물이 맑은 샘물이든, 갈증만 불러일으키는 바닷물이든 상관할 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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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귀스트 로댕, 1898, Dorn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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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하는 카미유 클로델, 1887년경



카미유는 로댕을 처음 본 건 1882년의 어느 날이었다.

이때 카미유는 열여덟이었다. 로댕은 이보다 배 이상 많은, 마흔두 살이었다. 지금껏 카미유는 조각가 알프레드 부셰의 공방에 있었다. 손끝에서 감도는 기량을 차츰 꽃피우고 있었다. 그러다 부셰가 공모전에서 상을 받고 로마 유학 기회를 얻는다. 부셰가 짐을 챙겨 떠나기 전 “나만큼 감각이 좋은 사람”이라며 소개해 준 이가 로댕이었다.

카미유는 그때부터 로댕의 공방으로 몸을 옮겼다. 그의 가르침을 받고, 그의 작업을 보조했다. 카미유는 알 수 있었다. 로댕 또한 매 순간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걸. 카미유와 로댕은 영화의 정해진 각본에 들어온 듯, 자연스럽게 연인으로 발전했다.

그대를 미치도록 사랑하오. (…)그대에게 내 영혼을 바치리다.
카미유는 로댕이 이처럼 낯 뜨거운 연서(戀書)를 보내는 데 대해 정복감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떤 남자든 진실한, 진정한 사랑 앞에선 시인이 된다고 믿었으니까. 그 시인이 곧 탈을 벗고 무슨 사고를 몰고 올 지 생각도 못 한 채.

“로댕과 너무 비슷한데?”
무언가 잘못됨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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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귀스트 로댕, 지옥의 문 “여기에 들어오는 그대, 모든 희망을 버릴지어다.”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 속 지옥의 문에 새겨진 문장이다. 카미유는 작업 중 이 글을 거듭 읽고서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로댕이 그녀에게 ‘구원의 문’이 아닌 ‘지옥의 문’이 되리라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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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귀스트 로댕, 입맞춤 [Tylwyth Eldar] 로댕의 대표작. 언뜻 보면 남녀가 끈적하게 사랑을 나누는 듯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둘 사이에 온도차가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남자 품에 안긴 여성은 그의 목을 적극적으로 끌어안고 있다. 모든 것을 내어줄 기세로 찰싹 밀착한 모습이다. 그러나 남성은 그렇게까지 그녀를 꽉 붙들고 있지는 않다. 한쪽 손을 그녀 허벅지에 대고 있기는 한데, 정확히는 그저 ‘얹은’ 데 가까운 듯하다. 여기서 망설임 내지 조심스러움의 심리를 엿볼 수 있다면 너무 나간 것일지. 남성을 로댕, 여성을 카미유로 빗대도 한층 더 의미심장한 작품이 된다.



하루빨리 ‘로댕 부인’이 되고자 한 카미유는 몸과 마음을 바쳐 로댕을 도왔다.

카미유는 로댕이 <지옥의 문> 과 <입맞춤> 등 걸작을 빚을 때도 옆에 붙어 호흡을 맞췄다. 로댕은 카미유에게 조각상의 손과 발 작업을 맡겼다. 이는 근육과 핏줄, 잔주름과 미세한 떨림 등 가장 섬세한 기술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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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귀스트 로댕, 다나이드 지옥에 발을 디딘 다나이드는 결코 채워지지 않는 독에 물을 퍼 나르는 형벌을 받는다. 끝없이 애쓰지만, 끝없이 허탈할 수밖에 없는 그녀는 허리를 숙인 채 절망하고 있다. 이는 어릴 적부터 마땅히 받아야 할 사랑을 받지 못한, 그래서 끝없이 사랑을 갈구하게 된 카미유의 상황과도 절묘하게 포개진다.



언젠가부터 카미유는 늘 로댕과 함께였다.

둘은 공방에서, 사교장에서, 나아가 단둘만 있는 별장에서도 끊임없이 사랑을 속삭였다. 카미유는 그사이 로댕을 위해 대리석만 파내지 않았다. 해말간 외모와 함께 조각 예술에 대한 높은 이해도를 갖춘 그녀는, 로댕을 위한 세상 하나뿐인 뮤즈로 모델 일도 했다. 로댕의 또 다른 대표작 <다나이드> 는 그런 카미유에게 포즈를 취하게 시켜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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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유 클로델, 베르툼누스와 포모나(사쿤달라의 대리석 버전) [Rodin museum] 카미유는 고대 인도 시인 칼리다사의 희곡을 참고해 <사쿤달라> 를 빚었다. 남자는 무릎을 꿇은 채 여자를 끌어안고 있다. 여자는 이제야 안심이 되는 듯 힘을 뺀 채 남자에게 몸을 기댄다. 이는 카미유가 꿈꾼 본인과 로댕 사이의 관계가 아니었을지. 로댕의 <입맞춤> 속 남녀 모습과는 다소 다른 구도인 작품이다.



카미유는 촘촘한 일정 속 자기만의 작업에도 매달렸다.

로댕의 일을 돕는 것만으로 잘 먹지도, 쉬지도 못하는 나날이었지만 자아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그녀는 1888년, 영혼을 쏟아 만든 작품인 <사쿤달라> 를 내보였다. 이때 나이는 스물넷이었다. 너무 선정적이라는 말도 있었지만, 특유의 농밀한 표현력을 놓곤 아무도 이견을 낼 수 없었다. 카미유는 이 조각상으로 프랑스 예술인 상을 받았다.

그런데… 영예로운 수상 뒤로는 영 반갑지 않은 말이 돌기 시작했다. 그것은 “로댕의 작품과 너무 비슷하다”라거나, “로댕이 뒤를 봐준 게 틀림없다”는 식의 낭설이었다. 카미유는 이쯤부터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더는 저를 속이지 마세요”
가장 원하는 걸 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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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유 클로델, 1886년경(추정)



아닌데, 정말 아닌데….

카미유의 외침은 공허한 메아리로 돌아올 뿐이었다. 카미유의 상황을 알 수 없는 이들은 그녀를 그저 로댕의 아류로만 봤다. 외려 로댕의 작품 곳곳에 그녀 손길이 새겨져 있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했다. 카미유는 혼란스러웠다. 열심히 일하고, 힘껏 사랑한 결과가 이런 사고로 돌아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렇다면 로댕은 다시 불행을 향해 나아가는 카미유를 어떻게 대했을까.

함께 마음 아파하는 모습을 보이기는 했다. 주변 이들에게 “카미유는 그 자체로 훌륭한 조각가”라는 말을 하고 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결혼.

로댕은 카미유가 가장 원하는 걸 허하지 않았다. 카미유는 이를 통해 사랑의 열매를 맺고, ‘로댕의 뒤통수를 친 도둑’ 따위의 오명도 말끔히 벗고 싶었다. “흔들림 없는 관계로 시작한 (…)카미유는 내 아내가 될 것이다.” 카미유는 과거 로댕이 쓴 편지를 쥐고 있었지만, 정작 로댕 본인은 이를 외면하는 모습만 보였다.

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또 편지를 씁니다. (…) 당신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하고 싶어 알몸으로 누워 있습니다. (…) 부탁이에요. 더는 저를 속이지 마세요.
카미유는 로댕에게 호소했다. 가슴 밑바닥부터 켜켜이 쌓인 불안증이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로댕은 카미유의 행보를 부담스러워하기 시작했다. 둘 사이 감정의 골은 나날이 깊어졌다. 그리고, 사고는 숨 돌릴 틈도 없이 또 터지고 만다. 이는 사고라고 할 수도 없었다. 재앙에, 참사에 더 가까웠다.

피해자들 사이 빚어진 사고
그곳서 피눈물 흘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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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유 클로델, Les Causeuses [Rama]



“너는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알지? 주제를 알고 정도껏 해. 나도 참을 만큼 참았다고!”

한 여자가 있었다. 농부의 딸, 세탁부이자 재봉사, 그리고 로댕의 피가 섞인 한 아이의 어머니…. 카미유보다 스무 살 많은 그녀의 이름은 로즈 뵈레.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카미유가 태어난 그해부터 로댕과 인연을 이어간(!) 여인이었다. 정식 결혼만 하지 않았을 뿐, 로댕과는 부부와 다름없는 관계의 여성이었다. 즉 카미유와는 비교도 못할 만큼 로댕과 진한 인연을 다져온 사람이었다. “나를 향해 동물적인 충성심을 지닌 여자.” 로댕이 이렇게 말할 만큼, 오직 로댕에게만은 한없이 너그러운 심성의 소유자였다.

카미유도, 로즈도 예전부터 각자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카미유는 로댕이 곧 로즈를 내쫓을 것으로 봤기에, 로즈는 로댕이 언제라도 카미유를 쳐낼 것으로 믿었기에 상대를 가만히 뒀을 뿐이었다. 그런 로즈가 폭발하고 말았다. 그리고, 용암처럼 쏟아지는 화를 몰고 그곳을 습격하듯 찾은 것이었다. 카미유 점토 작업을 하고 있던 곳, 그녀의 작업실에.

“임자 있는 사람을 유혹이나 하고 말이야!“

로즈는 카미유가 빚고 있던 로댕의 흉상을 발로 차 뭉개버렸다. …유혹? 멍하게만 있던 카미유의 표정은 그제야 일그러졌다. 누가 누구를 유혹했다는 말인가. 외려 내가 그자에게 유혹당해 혼을, 열정을, 청춘을 바친 피해자가 아닌가. 울화가 용오름처럼 치솟았다. 카미유는 새빨개진 두 눈으로 로즈에게 다가갔다. 그때…

“로즈!”

철문이 또 한 번 열렸다. 모습을 보인 건 로댕이었다. 로댕은 어느새 주저앉아 울고 있는 로즈를 부축했다. “카미유. 대체 로즈에게 뭘 하려고 한 거야!” 로댕은 덜덜 떨며 울먹이는 카미유를 질책한 뒤,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사라졌다. 한 남자에 의한 피해자 둘 사이에서 빚어진 참극은, 그렇게 끝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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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유 클로델, 1883년경 [Casar]



…저인가요? 그 여자인가요? 카미유는 언젠가 로댕을 추궁한 적이 있었다. 로댕은 그때 어설픈 웃음으로 상황을 넘겼다. 오늘 이 순간 그의 대답을 들은 것 같았다.

카미유는 쪼그려 앉았다. 로즈가 부순 흉상의 조각을 집어들었다. 날카로운 모서리가 손끝을 찔렀다.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그녀는 그제야 울음을 터트렸다. 1892년, 카미유는 로댕에게 이별을 고했다. 이때 카미유는 스물여덟, 로댕은 쉰두 살이었다.

성숙의 시대 속 ‘상징’…
그녀는 영혼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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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유 클로델, 성숙의 시대 [이원율 기자] 이 조각상은 카미유 개인의 서사를 배제하고 봐도 밀도 높은 예술성을 갖는다. 나이가 찬 사람은 젊음과 싱그러움을 등진 채 죽음과 가까워질 수밖에 없다는 것. 이러한 인간의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을 표현했다고 보기에도 충분한 작품인 것이다. “당신에게는 천재성이 있었어요. 이건 과장된 말이 아니에요. 당신은 왜 우리에게서 이런 아름다움을 앗아갔단 말입니까.” 카미유와 알고 지낸 작품 중개상 외젠 블로는 그녀를 놓고 이런 편지를 쓴 적이 있다.



늙은 남성이 앞을 보며 나아간다.

마녀 같은 여성이 그의 발걸음을 부추긴다. 직전까지만 해도 사내의 손을 잡고 매달렸을 듯한 젊은 여인은, 뿌리침을 당하고도 호소를 멈추지 않는다. 카미유의 걸작 <성숙의 시대> 였다. 작품 속 선한 역과 악역은 선명히 구분할 수 있다. 남자에게 가지 말라고 애원하는 여성이 선, 끝까지 꼬드기는 여성이 악이다. 카미유의 처지를 아는 모든 이는 각 등장인물의 진짜 이름도 알 수 있었다. 선은 카미유, 악은 로즈, 미련하게 악과 함께 걸어가는 이는… 로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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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유 클로델, 성숙의 시대 [이원율 기자]



로댕 또한 그 ‘상징’을 몰랐을 리 없다.

로댕은 날 조롱거리로 만들지 말라며 카미유의 조각 출품을 말렸다. 하지만 영혼이 사라진 카미유는 1893년, 로댕의 경고를 무시하고 이를 공개했다. 이 조각상은 뛰어난 작품성, 알 사람은 다 아는 밀도 높은 주제 의식으로 인해 곧장 화제 반열에 올랐다. 이로 인해 둘도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물 위로 떠오르기를 포기하고
마지막 발버둥도 멈춰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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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유 클로델, 왈츠 [Wuselig] 카미유는 로댕과 헤어진 뒤 작곡가 클로드 드뷔시와 아주 가까워진 적이 있었다. 다만, 교제 기간은 길지 못했다. 왈츠는 카미유가 드뷔시에게 영감을 얻어 빚었다고 한다. 조각상을 선물 받은 드뷔시는 이를 평생 간직했다고.



결국은 로댕의 옛 연인. 그래봤자 로댕을 따라하는 제자.

로댕, 로댕…. 카미유는 미칠 노릇이었다. 그녀는 홀로서기 위해 쉼 없이 작업했다. 그러나 뭘 해도 로댕이라는 이름, 그 커다란 그림자가 그녀를 집어삼켰다. 그놈의 표절 의혹도 끊이질 않았다. 잘 풀릴 뻔한 기회도 몇 번 있었다. 든든한 후원자도 구했고, 그녀 중심의 전시도 기획된 적이 있었다. 로댕 또한 죄책감은 느꼈는지, 은근히 그녀 뒤를 봐주기도 했다. 하지만 매번 결정적일 때 일이 꼬였다. 여성 예술가에게 특히나 박했던 당시 사회 분위기도 영향을 줬을 것이다. 카미유는 결국 논란을 극복해내지 못한다. 그녀는 물 위로 떠오르기를 완전히 포기한다. 발버둥을 멈춰버린다.

그때부터 카미유는 흐릿한 삶을 살았다.

제대로 먹지도, 씻지도 않은 채 집과 거리, 작업실만 오갔다. 방 안에는 쓰레기만 가득했다. “내 재능을 무서워하는 로댕이 나를 죽이려고 해요.” 사람이 있든 없든, 이런 말만 중얼거리며 울고 웃었다. 본인이 로댕의 아이를 뱄었다는 주장, 그런 폭탄 발언을 내놓기도 했다.

“나는 깊은 수렁에…”
30년간 수용소 갇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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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귀스트 로댕, 1891년경 [Nadar]



1913년, 마지막 우군이던 아버지가 죽은 해. 그녀는 몸과 정신을 모두 심연 끝단까지 가라앉히고 만다.

그저 여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딸을 용서하지 못한 어머니, 사회적 위상이 높은 동생 폴(그는 외교관이자 유명한 시인 겸 극작가였다)은 카미유를 수용소로 데려갔다. 카미유의 찬란한 재능은, 빛나는 외모는 그곳에서 바스러졌다. “폴. 네 누나가… 감옥에 갇혀 있다는 걸 잊지 말거라.” 카미유는 종종 쇠침대에 앉아 편지를 썼지만, 그녀가 다시 바깥 공기를 맡을 일은 없었다. 1년도, 5년도 아닌 30년 동안이나.

추위를 많이 탄, 끝없이 괴롭고 외로워한 카미유가 마주한 마지막 사고는 세상의 무관심이었다.

카미유는 1943년 10월19일에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마흔아홉 살부터 갇힌 채 살아간 그녀가 죽었을 당시 나이는 일흔아홉 살이었다. 카미유는 눈을 감는 순간까지 로댕을 원망하고, 한편으로는 그리워했다고 한다. 그가 1917년, 그러니까 25년도 더 전에 이미 죽었다는 걸 실감하지 못한 채. 장례식 참석자가 없었기에, 그녀는 결국 무연고자로 공동 매장됐다.

나는 깊은 수렁에 빠졌습니다. 나는 너무나 기이하고 낯선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나의 삶이 꾸는 꿈은 악몽입니다.카미유 클로델의 글, 1935년 추정
카미유는 사랑을 믿었다. 부족한 만큼 갈구하고, 허전한 만큼 욕망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사람들은, 그녀가 선 세상과 무대는 단 한 번도 그런 걸 제대로 안기지 않았다.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을 지울 수 없다. 운명의 신은 애초 카미유를 고통 아닌 부드러움으로 쉽게 다룰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순수하고, 정열적인 예술가였으니까.

참고자료
카미유 클로델, 카미유 클로델, 마음산책

여기, 카미유 클로델, 이운진, 아트북스

Camille Claudel, Getty Trust Publications

기자의 말풍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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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에 보는 그림



독자님들의 격려 덕에 탄생할 수 있었던 신간 《마흔에 보는 그림》이 출간과 동시에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습니다. 깊은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후암동 미술관> 도 150회차를 맞이했습니다. 어느덧 150주가량을 썼다는 이야기겠지요. 앞으로도 최선을 다해 글과 예술을 고민하고, 준비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위로, 아울러 꿋꿋함과 애틋함을 마음 담아 전할 수 있도록 애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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