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경북 안동시 남후면 고상리 인근 중앙고속도로를 따라 불길이 길게 이어져 있다. [연합] |
[헤럴드경제=이정아 기자] 조선의 선비정신이 깃든 종택, 서당, 사당 등 문화유산들이 한순간에 잿더미로 변했다.
지난 21일 발생한 산불의 장기화 여파로 경북 안동시까지 뻗친 화마는 조선시대 중후반에 세워진 문화유산을 집어삼켰다. 지산서당, 지촌종택, 국탄댁 등 의성 김씨 김방걸(1623~1695) 선생과 관련된 옛 건축물이 큰 피해를 입었다.
27일 경북 안동시 남선면 이천리에서 소방대원이 화재진압을 하고 있다. [연합] |
2015년 촬영된 안동 지산서당. 지난 21일 발생한 산불이 일주일째 확산되면서 끝내 불길에 휩싸여 전소됐다. [국가유산청] |
전례 없는 확산 속도를 보이는 이번 산불로 경북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된 안동 지산서당이 전소됐다. 지산서당은 조선 후기 문신인 지촌 김방걸 선생의 덕을 기리기 위해 1800년에 세운 서원이다. 이곳과 불과 20여m 떨어진 지촌종택도 화마를 피해가지 못했다. 경북도 민속문화유산인 지촌종택은 김방걸 선생을 모시는 종가다. 본채와 곳간, 문간채, 방앗간 등과 조상의 위패를 모신 사당, 별묘로 구성돼 있는데 모두가 불에 타버렸다. 김방걸 선생의 후손인 김시정 공이 분가하면서 조선 후기에 지은 집인 국탄댁도 전소됐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안동을 지켜낸 대박 김철의 묘소를 보호하기 위해 세운 송석재사도 자취를 완전히 감췄다. 의성 김씨 가문의 뿌리를 상징하는 구암정사의 협문도 불길에 타 버렸다. 구암정사는 의성 김씨로 처음 안동에 터전을 잡아 살기 시작한 김근(1579~1656) 선생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이다.
경북 의성군 단촌면 고운사 가운루를 비롯한 건물들이 전날 번진 산불에 모두 불에 타 흔적만 남은 모습. 이번 화재로 보물로 지정된 가운루와 연수전 등이 소실됐다. [연합] |
지난 26일 밤사이 화마를 피하지 못한 국가유산은 안동 용담사의 무량전과 금정암 화엄강당, 그리고 의성 관덕동 석조보살좌상 등이 더 있다.
화마로 사라진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 고운사 소속의 용담사는 664년(신라 문무왕 4년)에 세워졌고 1574년(조선 선조 7년)에 한차례 고쳐 지어진 소박한 사찰이다. 오랜 세월을 견뎌내면서 다른 건물들은 없어지고 무량전과 요사채, 근래에 세운 대웅전만 남았는데, 이 중 경북도 문화유산자료인 무량전이 이번 화재로 전소됐다. 용담사 남쪽 800m 지점의 금학산 중턱에 위치한 또 다른 경북도 문화유산자료인 금정암 화엄강당도 불 타 사라졌다. 이곳은 안동 사람들이 복을 비는 장소였다.
경북 의성 관덕동의 3층 석탑과 함께 있는 불상인 석조보살좌상도 불길을 피하지 못하면서 훼손된 것으로 추정된다. 높이 98㎝의 불상으로 8세기 신라시대의 뛰어난 조각 솜씨를 보여주는 경북도 유형문화유산이다.
청송 대전사에 방염포가 설치된 모습. [국가유산청] |
국가유산 재난 국가 위기 경보가 사상 처음으로 ‘심각’ 수준으로 격상된 가운데, 국가유산청·국립문화유산연구원·문화유산돌봄센터·안전경비원 등 750여 명이 현장에서 국가유산을 보호하기 위한 비상근무를 이어가고 있다. 주요 사찰과 종가가 소장한 유물 23건(1566점)은 다른 안전 지역으로 이송됐다. 국가유산청은 만일을 대비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여겨지는 국보 안동 봉정사 극락전 등 주요 문화유산 44건에 방염포를 설치하는 등 추가 피해 방지를 위한 긴급 조치를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