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가 지난 14일 도쿄 국회에서 참의원 예산위원회가 열리길 기다리며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 AFP 연합뉴스 |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가 2차 대전 패전 80년을 맞은 올해 ‘전후 80주년 담화’를 내지 않는 쪽으로 조율하고 있다고 일본 언론들이 보도했다. “(일본) 후손들에게 사죄의 숙명을 지게 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을 담은 ‘전후 70주년 아베 담화’를 조용히 확인하겠다는 뜻으로 보이며, 대신 일본이 왜 무모한 전쟁을 일으켰는지를 검증한다는 계획이라고 전해졌다.
요미우리신문은 27일 복수의 일본 정부 관계자 말을 인용해 이시바 정부가 “국내외에서 역사 인식을 둘러싼 논쟁을 일으키기 쉬운 점을 고려해, 각의 결정(국무회의 의결)을 통한 ‘전후 80주년’ 담화는 내지 않은 방향으로 조정한다”고 보도했다. 산케이신문도 일본 정부가 “담화 발표 보류 방침을 굳혔다”고 정부 관계자들을 인용해 보도했다.
패전 50주년을 맞은 1995년 당시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가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주변국 침략에 대한 반성 및 사죄를 명시한 ‘무라야마 담화’를 발표한 이후, 역대 일본 내각은 10년마다 내각의 역사 인식을 담은 ‘전후 담화’를 발표했다. 2005년에는 당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하며 일본이 패전 후 “평화 국가”로서 걸어온 길을 강조하는 담화를 냈다. 2015년에는 아베 신조 당시 총리가 “전쟁과는 아무런 상관 없이 우리 아이들과 손자, 그리고 그다음 세대의 아이들에게 계속 사죄의 숙명을 짊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을 담은 아베 담화를 발표했다.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하지만 일본은 더 이상 사과를 하지 않겠다는 뜻을 담은 것이다.
이시바 총리도 역대 내각처럼 10년 주기가 돌아온 올해 이시바 내각의 역사 인식을 담은 담화를 발표할 수 있지만, 정치적으로 부담이 될 수 있는 담화 발표를 피하려는 듯 보인다. 요미우리신문은 “(아베 담화가) 역사 인식 문제에서 일정하게 종지부를 지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며 “자민당과 정부에서는 ‘같은 담화를 내면 가라앉았던 역사 인식 문제를 다시 불붙게 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고 보도했다. 산케이신문은 자민당 내에서 이시바 총리가 따로 담화를 내면 “아베 총리가 종지부를 찍은 ‘사죄 외교’로 돌아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고 보도했다. 결국 올해는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한다는 일본 정부 차원 별도의 표명도 없을 가능성이 있다.
대신 이시바 내각은 일본이 왜 ‘무모한 전쟁’을 일으켰는지에 대해 검증에 나서기로 했다고 일본 언론들은 전했다. 요미우리신문은 “다음달 전문가 회의를 열어 논의에 착수하고 8월 결과를 발표한다는 계획”이라고 정부 관계자들을 인용해 보도했다. 정치적으로 상대적으로 부담이 덜한 전쟁이 일본에 미친 악영향을 돌아보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1937년 중·일 전쟁부터 일본이 무조건 항복한 1945년 8월까지 기간을 검증 대상으로 삼는다고 신문은 전했다. 특히 일본 정부가 중·일 전쟁 시작 당시 법과 제도로 군부 폭주를 막지 못하면서 침략 전쟁이 시작된 경위, 1945년 3월 미군의 도쿄·오사카 등 대공습 때 대규모 민간인 피해를 막지 못했던 과정 등이 주요 논의 대상이 될 전망이라고 덧붙였다. 또 2차 대전 말 옥처럼 아름답게 부서진다는 뜻의 ‘옥쇄’라는 미명으로 죽음을 강요한 일본군의 작전 방식도 조사한다는 방침이라고 했다. 이시바 총리가 패전일인 8월15일 전문가 회의 결과와 자신의 견해를 곁들여 국민에게 설명하는 방안이 떠오르고 있다고 전했다.
일본 정부는 보도 내용을 검토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정부 대변인을 겸하는 하야시 요시마사 관방장관은 이날 정례 브리핑에서 “이시바 총리가 전후 80년 담화를 내지 않는 사안이나, 전쟁 검증 전문가 회의 설치를 검토한 사실이 없다”며 “이시바 내각은 이전 총리들의 담화 등을 전체적으로 계승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도쿄/홍석재 특파원 forchi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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