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안동시 길안면 백자리에서 25일 오후 소방대원들이 마을로 접근하는 산불을 진화하고 있다. 백경열 기자 |
“중간에 가서 호스 좀 더 땡겨봐”, “한 명 더 들어가야 겠는데?”
25일 오후 1시쯤 경북 안동시 길안면 백자마을(백자리) 인근 산에서 바람을 탄 불길이 밭과 민가 쪽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의용소방대 등 진화 인력이 다급하게 소리치며 달려왔다. 시뻘건 불길이 산 능선을 따라 계속 밀려 내려왔다. 불길이 지난 자리마다 희뿌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자욱한 연기가 사방으로 번지며 산의 형체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뒤이어 소방헬기가 굉음을 내며 날아와 불길을 향해 소방수를 뿌렸다. 그래도 불길은 쉽게 잡히지 않았다.
안동의 다른 곳으로 산불이 번지는 걸 막기 위해 소방당국이 ‘최후의 저지선’을 꾸린 곳이 바로 이곳 백자리다. 이 마을에는 40가구에 70여명이 살고 있다. 주민 대부분은 70대 이상 노령층이다. 전날밤에도 불길이 마을 코 앞까지 번졌지만 진화대가 사력을 다해 막았다.
소방수를 맞은 불길은 이내 사그라진듯 싶다가 강풍이 불면 다시 살아나고를 반복했다. 말그대로 ‘좀비 산불’이다. 산 전체에서 희뿌연 연기가 쉴새없이 피어올랐다. 마치 산이 통째로 삶아지는 듯한 모습이었다.
경북 안동시 길안면 백자리 한 야산에 25일 오후 불길이 번지고 있다. 백경열 기자 |
산에서 뿜어져나오는 연기로 백자마을도 온통 뿌옇게 변했다. 코를 찌를 정도로 매캐한 연기 때문에 숨을 쉬기 힘들 정도였다. 주민 대부분이 대피해 마을은 마치 ‘유령마을’을 연상케 했다.
이 마을에서 50년을 넘게 살았다는 이복자 씨(73)는 지난 24일 불이 확산하자 마을회관으로 몸을 피했다. 아침 들어 바람이 다시 강해지자 불안한 마음에 마을을 찾은 뒤 쉽게 떠나지 못했다.
그는 “어제 오후 4시쯤 불길이 마을까지 번졌고, 대피하라는 마을방송이 나오는 동시에 문자메시지도 왔다”며 “자정쯤에는 마을회관에서 안동체육관으로 대피했는데 집이 걱정되서 잠도 거의 못 잤다”고 말했다.
백자마을에서 나고 자란 김영화 씨(74) 역시 전날 황급히 몸을 피했다가 다시 마을을 찾았다. 그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산을 충혈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지금 잠이 오게 됐나. 걱정이 되서 1시간도 못 잔 것 같다”면서 “바람이 많이 부는데 언제 마을을 집어삼킬 지 몰라서 마음이 안 놓인다”고 말했다.
경북 안동시 길안면 백자리에서 25일 오후 산불이 확산하는 모습을 한 소방대원이 지켜보고 있다. 백경열 기자 |
마을회관 주변에는 이날 소방 펌프차 등 10여대의 차량과 소방대원, 산불예방진화대, 공무원, 주민 등 수십 명이 분주하게 오가며 산불 상황에 대처했다.
마을회관 부근에서 대기하던 소방대원의 무전기가 울렸다. “연기가 많이 피어오른다”는 무전이 전달됐다. 한 소방관이 다른 대원들과 함께 심각한 표정으로 얘기를 나눈 뒤 이내 분주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경기 시흥과 춘천 등지에서 지원을 온 소방대원들은 이날 15m짜리 소방호스 등을 동원해 능선을 타고 내려오는 산불을 향해 물을 뿌려대고 있었다.
한 소방관은 “오후 들어 바람이 거세지면서 전날 진화가 이뤄졌던 지역 곳곳에서 불길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면서 “이 곳을 반드시 지켜낸다는 각오로 최대한 접근 가능한 곳까지 진화 인력이 들어가서 불을 끄고 있다”고 말했다.
경북 안동시 길안면 백자리에서 25일 오후 의용소방대원들이 마을로 접근하는 산불을 진화하고 있다. 백경열 기자 |
산불이 나흘째 장기화되면서 소방대원과 진화대의 피로감도 극에 달하고 있다. 밤샘 진화가 이어지면서 잠도 제대로 못한 듯 보였다. 연기와 분진에 눈이 빨갛게 변한 진화인력이 대부분이었다.
한 소방관은 “임무가 끝나면 쉬긴 하지만 체계적으로 몇 시간마다 어떻게 쉰다, 이런 여건이 되진 않고 있다. 그야말로 총력 대응을 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고 전했다.
오후가 되자 9명의 소방대원이 마을회관쪽으로 걸어왔다. 대기 중이던 다른 대원들이 격려의 인사를 건넸다. 대원들은 지쳐 보였고, 소방복은 물론 얼굴 곳곳이 검게 그을린 채였다.
이들은 마을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산불 확산을 막은 ‘별동대’였다. 2시간가량 특별 임무를 소화하고 식사를 위해 잠시 들른 것이었다. 이들의 점심 메뉴는 밥에 만 오뎅국과 미역국, 컵라면 등이었다. 대원들은 바닥에 앉자마자 허겁지겁 허기를 채웠다.
경북 안동시 길안면 백자리에서 25일 마을로 최근접한 불길의 확산을 막은 소방대원들이 마을회관 뒤편에서 점심을 먹고 있다. 백경열 기자 |
한 대원은 “교대 인력이 없어서 식사를 마치는 대로 현장으로 가야한다”면서 “(하루 빨리 불을 꺼야 한다는) 한 마음으로 산불 대응에 나설 뿐”이라고 말했다.
안동시 소속 산불예방진화대도 길안면으로 불길이 확산한 지난 24일부터 38명이 투입돼 활동 중이다.
2년차 대원인 문동주씨(56)는 “전날 오전 10시쯤 투입된 이후 밤새 대기하면서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 쪽잠을 1시간 정도나 잤을까 모르겠다”면서 “경남에서는 동료들도 희생됐는데 많이 안타깝다. 안전에 각별히 유의하면서 활동 중”이라고 말했다.
경북 안동시 길안면 백자리에서 25일 한 주민이 마을로 접근하고 있는 불길의 진압 작업을 지켜보고 있다. 백경열 기자 |
소방당국은 이날 백자리 주변에만 차량 66대, 인력 273명을 집중 배치했다. 안동시 공무원 427명과 헬기 10대도 투입됐다. 요양원 등 취약시설에 머물던 208명과 산불 위험 반경에 있는 백자리·금곡리·현하리 주민들을 마을회관과 체육관, 학교 등지로 대피시켰다.
만휴정 등 중요 문화유산으로 불이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산불특수대응단 등 전문 인력이 전진 배치되지도 했다. 불씨가 강한 바람을 타고 어느 쪽으로 튈 지 알 수 없는 긴박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목조 건물을 보호하기 위해 방염포를 덮고 물을 뿌렸다.
경북소방본부 관계자는 “바람 방향이 수시로 바뀌고 있어서 진화에 애를 먹고 있다”며 “산불의 추가 확산 및 주민 피해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백경열 기자 merc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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