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원종태 기자 = 1. 오픈런
'아니, 카메라가 무슨 명품백이야? 오픈런이 있다고?'
"본 상품은 1대 이상 구매 시 사전 안내 없이 취소됩니다."
말인즉슨 X100VI 카메라는 1인 1대밖에 살 수 없다는 뜻이다. 동일 주소로 2대 이상 주문도 안되며, 각기 다른 아이디로 2대 구입도 할 수 없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카메라가 에르메스 버킨백은 아니지 않는가?
하지만 사실이었다.
X100VI 출시 초기에는 카메라를 사려고 매장 오픈 전부터 긴 줄을 서는 '오픈런'이 목격됐다. 후지필름 코리아 측은 "X100VI 역대급 물량을 일본 본사에 요청했지만 품절 사태가 이어지고 있다"며 "2024년 2월 X100VI 첫 출시 이래 지금까지 '1인 1대' 판매가 원칙이다"고 밝혔다.
사실 후지필름은 수많은 ‘최초'를 만들며 카메라 시장을 이끌어 왔다. 전 세계 카메라 시장의 트렌드가 후지필름에서 싹 튼 장면은 한 둘이 아니다.
하지만 후지필름도 당해내기 쉽지 않은 시대의 변화가 스멀스멀 밀려왔다.
2007년 애플 아이폰 출시 이래 핸드폰 카메라 성능은 갈수록 좋아졌고, 사람들은 더 이상 카메라를 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후지필름 적수는 이제 캐논과 코닥이 아니었다.
후지필름 입장에선 반전이 필요했다. 후지필름은 20만~30만원짜리 콤팩트 카메라로는 핸드폰 카메라와 차별화가 안된다며 프리미엄 카메라로 방향을 돌렸다.
스마트폰에 장착된 200만 화소짜리 카메라가 그들이 넘어야 할 산이었다. 화소는 픽셀의 다른 말로 디지털 이미지를 구성하는 점의 갯수다.
200만 화소란 200만개 점으로 하나의 이미지를 만든다는 것인데, 얼마 안 가 휴대폰 카메라 중에는 800만 화소, 1200만 화소까지 등장한다.
'게임의 룰' 자체가 바뀐 것이다.
2. 아날로그
후지필름은 콤팩트하면서도, 성능은 뛰어난 카메라가 필요했다.
후지필름은 좋은 카메라의 핵심 컨셉으로 유저들의 유년기 경험을 소환했다. 유저들의 어린 시절 집안 캐비닛에 고이 모셔 두던 '만지면 안되는' 카메라처럼 개발하겠다는 컨셉을 세웠다.
그렇게 2010년 9월 후지필름은 ‘새로운 카메라' X100 시대를 열어 제쳤다.
X100은 유저 트렌드를 가장 빠르게 반영한 가장 ‘후지필름’다운 디지털 카메라였다.
유저들은 셔터 스피드 다이얼과 노출 보정 다이얼을 살살 돌리고, 조리개 링도 촉감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겉모습만 보면 필름 카메라인지 디지털 카메라인지 구분이 안될 정도였다.
하지만 이 카메라 안에는 필름이 있을 자리에 1230만 화소짜리 APS-C 이미지 센서가 떡하니 자리 잡으며 필름 카메라보다 월등히 뛰어난 화질을 제공했다.
X100의 이런 아날로그와 디지털 결합은 '하이브리드 뷰파인더'에도 잘 녹아 있다.
하이브리드 뷰파인더는 카메라 렌즈를 통해 들어오는 장면을 볼 수 있는 광학식 뷰파인더(OVF)와 카메라 센서가 포착한 이미지를 LCD 화면에 보여주는 전자식 뷰파인더(EVF)를 모두 갖고 있다.
빠르게 물체나 장면을 찍을 때는 광학식 뷰파인더를, 좀 더 연출된 사진을 찍고 싶을 때는 전자식 뷰파인더를 쓰면 된다.
'응답하라 1988'이 방송하기 한참 전이었는데 X100 첫 모델은 아날로그와 레트로의 힘으로
13만대 이상 팔렸다. 그렇게 300만원짜리 디지털 카메라는 유저들이 호응하며 베스트셀러가 됐다.
3. 진화
X100은 명성에 안주하지 않았다.
자연계에서는 생물이 멸종해야 진화가 생긴다고 믿지만, 산업계는 기업이 멸종하지 않기 위해 미리미리 진화해야 했다. X100도 멸종하지 않으려고 스스로를 진화하며 후속 시리즈를 선보였다.
3년 뒤인 2013년 1월 출시한 X100 2세대 카메라 X100S는 '오토 포커스(AF, 자동초점)' 성능을 대폭 개선했다. 유저마다 조금씩 호불호가 갈렸지만 이 오토 포커스는 더 편리하고 빠른 촬영을 가능하게 해준 것은 분명했다.
후지필름의 진화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2014년 9월에는 전자식 레인지 파인더와 새로운 필름 시뮬레이션 모드인 ‘클래식 크롬’을 추가한 3세대 카메라 X100T를 출시했다.
이 3세대 카메라의 가장 큰 특징인 클래식 크롬이었다. 클래식 크롬은 흔히 그라디에이션(Gradation)이라고 부르는 단계별 색의 농도를 더 정교하게 해주는 기능이다. 그만큼 사진에 깊이와 울림을 줬다.
2017년 1월 발표한 X100F는 X100 시리즈의 4세대 카메라다. 이 제품에는 '3세대 센서'와 '화상처리 엔진'을 탑재한 것이 신의 한수였다.
센서는 고화소를, 엔진은 고속화를 한 단계 끌어올렸다. 이전보다 세밀하고 빠른 이미지 연출이 4세대 카메라의 강점이다.
후지필름의 이 7년에 걸친 X100에 대한 천착은 아날로그 감성을 갖는 디지털 카메라라는 입소문을 낳으며 수많은 마니아층을 형성했다.
4. 변주
그리고 X100 시리즈가 출시된 지 10년째를 맞는 2020년 2월.
후지필름은 강산도 변한다는 10년 간의 내공을 켜켜이 쌓아 완전히 새롭게 진화시킨 5세대 물건, X100V(파이브, Five)를 출시했다.
X100V는 카메라 전면의 다이얼과 레버, 뷰파인더를 이전보다 더 작고, 더 오밀조밀하게 만들었다. 다이얼은 압축했고, 사각형은 둥글게 깎았다. 한층 간결해진 디자인이라고 할까.
X100V가 유저들 요구를 가장 많이 반영한 대목은 다름 아닌 완전 플랫한 '틸트 LCD'다.
이전 X100 시리즈들도 카메라 후면에 LCD 스크린은 있었다. 하지만 위 아래로 기울거나 꺾이진 않았다. X100V의 이 틸트 LCD는 유저 시선을 더 자유롭게 해 눈높이 아래에서도 얼마든지 촬영이 가능했다. 셀카를 찍을 때도 이 틸트 LCD는 안성맞춤이었다.
후지필름은 여세를 몰아 2024년 2월 가장 최신작인 X100VI를 발표한다.
X100V와 X100VI는 겉모습만 봐선 구분이 쉽지 않다. 그만큼 VI는 V 디자인을 그대로 계승했다.
이전 카메라와 크기가 같았기 때문에, VI에만 있는 6스톱 IBIS를 추가하는 것은 난제였다. IBIS(In-Body Image Stabilization 손떨림 보정 장치)는 카메라 본체에 내장돼 촬영 시 카메라 흔들림을 막아준다. 여기서 6스톱은 흔들림을 6배 줄여준다는 의미다.
이러니 X100VI로 찍은 사진은 더 선명하고 안정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209만원에 달하는 고가에도 불구, X100VI는 폭발적 수요로 오픈런을 일으켰다. 후지필름은 전작보다 X100VI의 생산량을 2배 늘렸는데도 주문 대기는 잦아들지 않았다. 급기야 후지필름 홈페이지에는 고의인지 우연인지 모를 '품절' 표시가 오랫동안 이어지고 있다. 이 틈을 노리고 일부 쇼핑몰에선 아예 90만원이나 웃돈이 붙는 웃지 못할 일까지 벌어진다.
이쯤 되니 이 글 첫머리 질문이 풀린다. 버킨백 같은 후지필름 X100의 오픈런은 어찌보면 후지필름 혁신이 일방적으로 만든 장면이 아니다. X100을 기다린 팬들의 수요와 공급 부족이 맞물린 결과다.
5. 사진
후지필름은 2010년 이후 필름은 만들지 않는다. 그런데도 후지필름으로, 브랜드나 로고에 '필름'을 빼지 않고 있다. 필름은 셀룰로이드 필름 시대부터 디지털 카메라 시대까지 변함없이 후지필름이라는 사명으로 그 자리에 있다.
끝없이 진화하면서, 유저의 마음과 시간의 찰나를 간직하려는 카메라. X100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어찌보면 X100과 관련된 이 글은 잡설이다. X100을 설명한답시고 덤벼들었지만 글이라는 한계를 넘지 못한 가짜일 수 있다.
이보다는 카메라를 들고 나가 찍은 한 장의 컷 사진. 셔터를 누르는 손짓, 그 우연과 필연이 만난 빛의 기록. 그것이야말로 수 천자 글보다 더 진짜다.
[물건 탐구] 사람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 공들여 물건을 만든 흔적을 발견할 때가 있다. 오랜 시간 제조자들이 사력을 다한 흔적들. 이것이야말로 물건의 가치를 곱씹게 한다. 그래서 잘 만든 물건을 탐구하는 작업은 흥미롭다. '세상 모든 물건은 값지다'는 마음으로 물건들을 들여다보려 한다.
☞공감언론 뉴시스 won@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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