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2019년 6월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대화하고 있다. [로이터] |
[헤럴드경제=김수한 기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사회에 정립된 무력 영토확장에 대한 금기가 깨지고 있다고 영국 일간지 가디언이 23일(현지시간) 국제정세 전문가들을 인용, 분석했다.
신문은 ‘트럼프의 확장주의가 2차 대전 이후 국제질서를 위협하고 있다’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무력으로 영토를 확장하면 안 된다는 2차 대전 이후 금기가 트럼프를 비롯한 이 시대 정치 지도자들로 인해 깨지고 있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유엔헌장 2조는 ‘모든 회원국은 자국의 국제 관계에서 어떤 국가의 영토 보전 또는 정치적 독립에 반하는 무력 위협이나 행사를 삼간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트럼프 정부는 보드게임인 ‘리스크’(세계정복게임)의 실제 버전을 현실에서 구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신문은 미국외교협회가 발간하는 국제정치저널 ‘포린어페어스’의 최신판 제호가 ‘돌아온 정복의 시대’라는 점 또한 이런 분위기를 보여준다고 전했다.
아프리카에서 르완다 독재정권을 이끌며 콩고민주공화국 합병 의지를 보이고 있는 폴 카가메 대통령의 ‘거대 르완다’ 정책, 중동 내 이스라엘 극우세력의 요르단강 서안지구 편입 추진, 중국의 대만 편입 의사 등도 이러한 맥락과 닿아 있으며, 이들은 국제사회의 영토확장에 대한 금기가 약화하고 있는 현재 분위기를 이용할 여지가 있다고 신문은 우려했다.
가디언은 유럽 또한 예외가 아니라며 러시아가 북유럽과 동유럽 국가들을 실제로 침공할 수 있다는 가정 하에 이 문제가 심각하게 논의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또한 이보 달더 전 주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미국대사의 “트럼프가 취임하면 법과 규정에 기반한 질서가 더 이상 무의미해질 것”이라는 발언을 소개하면서 미국 대통령 스스로가 영토병합을 승인할 준비가 됐을 뿐 아니라 제국주의를 지향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신문은 이런 점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19세기 윌리엄 맥킨리 미 대통령 재임 시기와 비교할 수 있다며 당시 쿠바, 필리핀, 푸에르토리코, 하와이 등이 미국에 병합된 사실을 상기했다.
이런 맥락에서 쥐스탱 트뤼도 전 캐나다 총리가 이달 초 트럼프 대통령을 향해 쏟아낸 발언도 소개했다. 당시 트뤼도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이 캐나다 경제 전체를 붕괴시키려 한다. 그렇게 하면 캐나다 병합이 더 쉬워질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땅의 권력’ 저자인 마이클 앨버투스 시카고대 교수는 “2차 대전 이후 공공연히 타국 땅을 병합하겠다고 위협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며 “트럼프 당선 이후 정말 많은 것이 바뀌었다”며 향후 2차 대전 이후 정립된 국제질서가 격변할 것으로 전망했다.
그는 최근 나타나는 일부 팽창주의적 사고에 대해 “영토 경쟁을 위한 새로운 장이 이제 막 열린 것”이라면서 트럼프의 팽창주의 사고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를 병합하려는 러시아에 대해 미국의 태도가 바뀐 것 또한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한 “앞으로 다른 나라들도 대담하게 영토 문제에 대해 실험적으로 접근한 뒤 반발이 있는지 살펴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런 양상의 핵심 요소는 기술, 기후 변화, 희귀광물 수요 등이 될 것이라면서 트럼프의 그린란드 편입 의사, 르완다의 콩고민주공화국 병합 의사 등을 예로 들었다.
영국 왕립국제문제연구소(채텀하우스)의 글로벌거버넌스 및 안보정책 책임자 사미르 퓨리는 현 상황에 대해 2차 세계대전은 물론 냉전 이후 질서의 재편이 될 거라고 규정했다.
그는 “힘의 균형 관점에서 1945년 이후 체제는 물론, 1991년 이후 체제의 재편”이라며 “미국이 현재 어디에 있느냐를 이해하는게 중요하다. 트럼프는 고립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푸틴의 영토 병합에 보상할 수 있다는 사실 외에도 그의 행동에서 다소 제국주의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고 말했다.
퓨리는 이러한 국제질서의 재편이 어디까지 이를 것인지는 예측 불가능하다면서도 과거 걸프전에서 미국이 주도한 연합군이 쿠웨이트를 침공한 이라크를 징벌했던 것과 같이 앞으로 팽창주의를 추구하는 나라를 국제사회가 제재하는 일은 보기 힘들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미국 주도 연합군이 이라크를 징벌한 사건은 ‘신성한 국가 주권 존중’이라는 35년간의 시대 정신을 만들었다”면서 “사람들이 가장 우려하는 건 트럼프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회의론, 가자지구 편입론 등 그의 행동과 발언이 (팽창주의에) 허용적인 분위기를 어떻게 만들어낼지에 관한 것”이라고 했다.
트리니티 칼리지더블린의 국제인권법 교수인 마이클 베커는 “트럼프가 우크라이나를 배신하고 국가의 영토주권을 부정하려는 시도를 벌이고 있는데, 이는 이스라엘이 국제법을 위반할 여지를 주고 이런 식으로 폭력이 끝없이 순환하게 된다”고 말했다.
리딩대 국제안보학 강사인 케리 괴틀릭은 미국의 대외정책 변화가 과거 ‘비공식적 제국주의’에서 변화한 것을 가장 중요한 점으로 들었다.
미국은 20세기 미국 패권시대에 다른 나라의 쿠데타를 지원하는 등 특정 국가를 병합하지 않으면서도 영향력을 행사하는 ‘비공식적 제국주의’를 활용했지만, 이제 더 노골적인 수준으로 옮겨갔다는 의미다.
타니샤 파잘 미네소타대 교수이자 ‘돌아온 정복의 시대’의 저자는 자신의 저서에서 “정복은 근본적으로 민주주의와 공존이 불가하다”며 “자유주의적 국제질서의 원칙 다수는 영토 정복에 반대하는 규범이 없을 경우 생존할 수 없다. 그게 핵심”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