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두 차례의 휴가. 온 가족이 마중 나가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던 김포공항의 입국 게이트. 1년 내내 집 안에서 볼 수 있던 말린 대추야자. 아버지는 휴가와 함께 낯선 세계를 가져왔다. 아버지가 모래바람 속으로 사라져 있는 사이, 두 아이는 어머니와 함께 자랐다.”
지금 한국 미술계에서 가장 핫한 작가, 미디어 아티스트 김아영(46)의 신작이 공개됐다. 서울 청담동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21일 개막한 개인전 ‘플롯, 블롭, 플롭(Plot, Blop, Plop)’. 작가의 내레이션으로 전개되는 28분짜리 영상은 어린 시절 중동에 파견됐던 아버지와 얽힌 개인사가 바탕이 됐다. 당시 한양건설이 수주받은 프로젝트는 사우디 최초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 중 하나였던 리야드의 ‘알 마터 주택 단지’. 한국 교민들 사이에선 ‘한양아파트’로 불렸고, 걸프전 때는 쿠웨이트 난민들의 피란처가 되면서 ‘쿠웨이트 아파트’가 됐다가, 지금은 사우디아라비아 중산층이 사는 아파트로 변모했다.
김아영 신작 ‘알 마터 플롯 1991’ 스틸 이미지. 28분 길이의 1채널 영상이다. /아뜰리에 에르메스 |
김아영은 개인적 경험을 근현대 거시사로 확장했다. 이국 소식과 작은 선물에 기뻐했던 어린 시절 기억, 아파트 건설에 참여했던 아버지 동료들의 이야기, 수차례의 현지 답사와 주민 인터뷰 등을 바탕으로 알 마터 단지를 둘러싼 겹겹의 이야기를 한 편의 영상으로 구현했다. 석유 파동에 따른 에너지 위기, 한국 기업들의 중동 특수, 걸프전 등 석유를 둘러싼 지정학적 분쟁까지 다층적 서사가 감각적인 영상과 사운드에 담겼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17년간 작업을 하면서 저와 제 가족의 이야기를 전면에 드러낸 건 처음이라 용기가 필요했다”고 했다.
김아영 신작 ‘알 마터 플롯 1991’ 스틸 이미지. 28분 길이의 1채널 영상이다. /아뜰리에 에르메스 |
제목 ‘플롯, 블롭, 플롭’은 ‘구획, 방울, 퐁당’이라는 의미의 언어유희다. 김아영은 “플롯은 이야기의 구성이라는 의미 외에도 도면이나 땅을 나누는 구획, 음모나 작전 등 여러 의미를 갖고 있고, 블롭과 플롭은 각각 석유라는 액체 방울, 그리고 그것이 낙하하며 내는 소리를 상징한다”며 “석유가 매개했던 역사, 아파트 도면이 시사하고 있는 중의성, 그 장소가 교차해내고 있는 기억들을 모두 아우르는 제목”이라고 했다.
김아영은 지금 세계 미술계가 가장 주목하는 한국 작가다. 지난달 국내 작가 최초로 ‘LG 구겐하임 어워드’ 수상자로 선정돼 5월 뉴욕에서 시상식이 열린다. 대륙을 오가는 전시 일정도 연말까지 차 있다. 독일 베를린의 함부르거 반호프 미술관에서 개인전이 열리고 있고, 10월엔 홍콩 엠플러스 미술관 외벽에 영상 작업을 선보인다. 11월엔 미국 뉴욕현대미술관(MoMA) PS1에서 개인전을 연다.
서울 청담동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열리고 있는 김아영 개인전 전시 전경. /아뜰리에 에르메스 |
그에게 많은 상을 안긴 대표작 ‘딜리버리 댄서’ 시리즈는 헬멧을 쓰고 가상 도시를 질주하는 여성 라이더들의 이야기다. 과거에서 이야기를 건져 올린 이번 신작은 다소 결이 달라 보이지만, 작가가 꾸준히 탐색해온 주제의 연장선에 있다. 2015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본전시에서 20세기 역사를 석유의 관점에서 재구성한 ‘제페트, 그 공중정원의 고래기름을 드립니다. 쉘’을 선보여 호평받았다. 안소연 아뜰리에 에르메스 디렉터는 “사운드 퍼포먼스 작품이었던 제페트 연작을 10년 만에 시각적으로 구현하고 확장했다. 가족 앨범 사진, 실사 촬영 영상, 걸프전 관련 신문과 다양한 자료가 생성형 AI와 게임 엔진 애니메이션 등 첨단 기술과 함께 사용된 수작”이라고 했다.
작가는 “미래를 상상하는 만큼 고대에 대한 연구나 신화적인 시간에 대한 관심도 많다”며 “작업들이 늘 멀리 나가는 만큼 닻을 내리는 지점이 먼 과거에 있다. 내 작업에서는 늘 미래만큼 과거가 중요하다”고 했다. 6월 1일까지. 무료.
김아영 작가가 20일 서울 청담동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신작을 소개하고 있다. /연합뉴스 |
☞김아영(46)
영상과 사운드, 퍼포먼스와 텍스트 등 매체의 경계를 넘나들며 독창적인 상상력을 펼쳐왔다. 2023년 세계 최대 미디어 아트상인 ‘프리 아르스 일렉트로니카’에서 최고상인 ‘골든 니카’를 받았다. 지난해 제1회 ‘ACC 미래상’, 올해 ‘LG 구겐하임 어워드’ 수상자로 선정됐다. 철학책과 SF물 등을 즐겨 읽고 메모하며 아이디어를 얻는다.
[허윤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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