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는 어떻게 무너지는가 / 피터 터친 지음 / 유강은 옮김 / 생각의힘 펴냄
왼쪽부터 푸틴-트럼프-젤렌스키 [EPA·AP = 연합뉴스] |
“워싱턴은 불장난을 좋아하는 황제와 복종적인 신하들, 케타민(의료용 마취제이자 환각제)에 에 취해 공무원 사회를 숙청하는 광대가 있는 네로의 궁정이 됐다.”
지난 4일 프랑스 상원에서 중도우파 정당인 호라이즌 소속의 클로드 말뤼레 상원의원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네로 황제’에 빗대며 신랄하게 비판했다. 트럼프의 독재적인 행보와 미국 동맹을 저버린 친러시아 정책이 부메랑이 돼 미국의 영향력을 쇠퇴시킬 것이라는 경고였다.
네로의 사례는 강력한 제국의 황제라도 권력 네트워크가 그를 포기하는 순간 곧바로 별 볼일 없는 존재로 전락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권력이 내파하는 순간인 ‘네로의 모먼트’는 5000년 전 최초의 국가들이 진화한 이래 반복적으로 일어났다. 가장 최근 사례는 2021년 8월 아프가니스탄 이슬람공화국 붕괴다. 대통령부터 고위 관리들이 모조리 도망쳤고 탈레반은 수도 카불에 무혈 입성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네로 로마 황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왼쪽부터). |
국가는 다양한 방식으로 죽는다. 이 가운데 중앙 권력이 갑자기 파국적으로 해체되는 국가 붕괴는 역사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현상이다. 많은 사회가 내전, 혁명이나 심각한 수준의 정치적 혼란을 겪으며 명멸한다. 안정적이고 평화적인 시기는 100년, 길어야 200년이다.
신간 ‘국가는 어떻게 무너지는가’(원제 End Times)를 쓴 저자는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구소련이 멸망하기 전 미국으로 이주한 러시아계 학자다. 듀크대에서 동물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코네티컷대에서 생태와 진화생물학부, 인류학과, 수학과 교수로 있다. 그는 복잡계 이론대로 컴퓨터 모델링과 빅데이터 분석을 결합해 역사에서 되풀이되는 정치적 위기와 국가의 붕괴를 추적하고 이론화한다.
그에 따르면 위기는 네 가지 구조적 원인에서 시작된다. 대중의 궁핍화, 엘리트 과잉 생산, 국가 재정과 정당성의 약화, 지정학적 요인이다. 이 중 가장 중요한 요인은 엘리트 과잉 생산인데, 엘리트 진입에 실패한 자들의 불만이 대중의 경제난과 결합해 폭발적인 힘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사회 상층부가 너무 무거워지면 사회 안정을 무너뜨린다. 엘리트는 쉽게 말해 ‘권력 소유자’다. 상위 10%는 자신의 삶에 대한 권력을, 상위 1%는 다른 사람들의 삶에 대한 많은 권력을 갖고 있다. 문제는 권력 지위보다 권력 지망자가 더 많다는 사실이다.
국가는 어떻게 무너지는가 |
저자는 트럼프라는 정치 아웃사이더를 2016년 권력의 꼭대기로 밀어 올린 것도 개인의 특질보다는 사회적 힘이었다고 강조한다. 그 사회적 힘은 엘리트 과잉 생산과 대중의 궁핍화다. 부자는 더 부자가 되면서 미국에서도 슈퍼리치들이 급증했다. 트럼프는 공직을 열망하는 초부유층 집단을 상징한다. 여기에 자신이 뒤처졌다고 느끼는 백인 남성들의 지배계층에 대한 분노가 합쳐졌다. 반엘리트 열풍이 불면서 한 번도 공직을 맡은 전력이 없는 슈퍼리치를 57대 대통령으로 앉힌 것이다. 트럼프 2기 행정부와 공화당 역시 J D 밴스 부통령을 비롯한 ‘냇콘(NatCon·국가보수주의)’들이 대거 장악하면서 미국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여전히 ‘엘리트 혁명’이 벌어지고 있다는 진단이다.
에이브러햄 링컨을 대통령으로 만든 사회적 힘도 이와 비슷하다. 남북전쟁 이전에 미국을 통치한 지배계급은 면화 대농장을 소유한 남부 귀족 노예주와 은행가, 법률가였다. 그러다 광업과 철도, 철강 생산에서 새로운 엘리트들이 대거 배출되기 시작한다. ‘잉여’ 엘리트와 남북전쟁으로 삶이 피폐해진 대중이 결합해 링컨 대통령을 탄생시켰다는 얘기다.
이 논리에 따르면 지금 가장 취약한 국가는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다. 우크라이나는 소련 해체 이후 국유 기업의 대규모 민영화로 생겨난 부를 올리가르히(신흥재벌집단)들이 차지하며 이들 파벌 간의 심각한 권력 투쟁이 벌어졌다. 금권정치가 시작되며 지배계층의 부패는 심각해졌다. 정치 경험이 없는 코미디언 출신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가 대통령이 되기에 이르렀다. 러·우 전쟁으로 피폐해진 민중과 좌절한 엘리트들의 결합이 어떤 결과물을 도출할지 알 수 없다. 저자는 우크라이나가 침몰하는 국가가 될 것인지, 군사정치로 변신할 것인지 선택에 놓여 있다고 전망한다.
한국은 안전지대일까. 국민소득에서 상위 1%가 차지하는 비중은 1990년대 이후 2023년까지 2배 이상 증가했고, 전 세계에서 대졸자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가 한국이다. 이들을 소화할 만한 일자리도 줄고 있다. 상층부가 무거워지고 있는 것이다.
역사학자 아널드 토인비는 거대한 제국은 살인이 아니라 자살로 죽는다고 진단했다. 우리 사회 지도층의 분열과 갈등, 서민의 민생고를 결코 가볍게 볼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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