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야당이 국민연금 모수개혁을 놓고 또 다시 ‘단독 처리’ 카드를 꺼내들었다. 연금개혁의 한 축인 모수개혁은 2000만명 이상이 가입한 국민연금을 ‘더 내고 더 받는’ 방식으로 손질하는 게 골자다.
여야 합의가 반드시 필요한 연금개혁 문제마저 의석 수를 무기로 단독 처리할 경우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앞서 민주당은 20일 본회의에서 개정안을 처리하기 위해 전날(18일)부터 여러 차례 법안심사소위를 열 것을 제안했지만, 국민의힘은 의원 일정 등을 이유로 오는 21일 소위 개최를 주장한 것으로 파악됐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이날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우선 큰 틀에 합의한 만큼 20일 본회의 통과를 목표로 논의를 계속해가야 한다”고 말했다. 민주당 측 복지위 관계자는 전체회의 개최 검토와 관련해 “정책위의장의 요청이 있었다”고 했다.
여야 양당 지도부는 앞서 보험료율을 현행 9%에서 13%로, 소득대체율을 현행 40%에서 43%로 올리는 모수개혁안에 구두 합의했다. 모수개혁안을 복지위에서 처리한 뒤 국회 연금개혁특위에서 국민연금 수급액 조정을 위한 자동조정장치 도입, 기초·퇴직연금 등과의 구조개혁 문제를 다루기로 했으나 세부 사안에서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여야가 평행선을 달린 대표적인 사안은 국회 특위 구성안에 담길 ‘문구’다. 국민의힘은 21대 국회 연금개혁특위 구성안에 담긴 ‘여야 합의 처리’ 문구를 포함시킬 것을 요구했으나, 민주당은 이를 반대하고 있다. 민주당은 합의가 불가능할 경우 ‘다수결’의 원칙을 따라야 한다는 입장이다. 다수결의 원칙을 따를 경우 민주당 6명, 국민의힘 6명, 비교섭단체 1명으로 구성되는 국회 특위에서 야당이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
전날 우원식 국회의장 주재로 열린 양당 원내대표와 정책위의장 회동은 이러한 갈등에 기름을 부었다. 양당 지도부가 모수개혁안에 대한 합의를 재확인했는데, 문구를 둘러싼 이견이 뇌관으로 작용한 것. 김상훈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은 별도의 브리핑을 열어 “우리 당은 국회 특위에서 안건을 ‘합의 처리’ 한다는 전제하에, 특위 구성이 먼저 선결되고 나서 복지위에서 모수개혁 합의 처리를 하도록 한다는 것”이라고 못박았다. 진성준 민주당 정책위의장은 맞불 기자회견을 열고 “합의를 뒤집어 엎는 듯한 브리핑”이라며 “연금개혁 논의가 이렇게 공전하게 된다면 합의안을 기초로 민주당이 단독 처리할 수 있다는 점을 말씀드렸는데, 이제 적극적으로 검토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고 했다.
국민의힘에서는 아무리 여야 합의안이라도 구조개혁에 대한 합의가 전제되지 않은 모수개혁 단독 처리는 ‘개악’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연금개혁 논의에 참여했던 한 국민의힘 의원은 “현재 모수개혁 만으로는 우리 당 내부에서도 개혁이 아닌 개악이라 지적하는 목소리가 있다”며 “이것을 특위에서 바로 잡아야 하는데 안 하겠다는 것 아니냐”고 했다. 이어 “(연금개혁은) 단타성 정책인 아닌, 오랜 시간이 걸리고 국민에게 어마어마한 영향을 주는 문제”라며 “이렇게 중요한 연금 문제에서 합의 처리 정신을 지키지 않겠다는 것은 막 나가겠다는 것”이라고 했다.
다수 의석을 무기로 한 민주당의 압박 전술은 22대 국회 들어 크게 늘어났다. 나경원 국민의힘 의원실이 국회 사무처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22대 국회에서 여야 이견이 있는데도 표결로 상임위를 통과한 법안은 총 117건에 달했다. 21대 국회(64건), 20대 국회(7건), 19대 국회(10건) 등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숫자다. 국회 본회의에서는 지난해 7월부터 9개월 동안 채상병특검법과 방송4법(방송법·방송문화진흥회법·한국교육방송공사법·방송통신위원회법 개정안), 전 국민 25만원 지원법(민생회복지원금지급 특별조치법), 노란봉투법(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개정안), 김건희특검법 및 내란특검법 등이 줄줄이 야당 주도로 통과됐다. 가장 최근인 지난 13일에는 이사의 충실 의무를 회사에서 주주로 대폭 확대하는 상법 개정안이 강행 처리됐다.
민주당의 잦은 강행 처리에 대한 국민의힘의 반감도 나날이 커지고 있다. 한 국민의힘 의원은 “민주당이 합의 처리 문구를 정부의 거부권과 연결짓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며 “일방 처리하고 싶다는 본심이 드러난 게 아니냐”고 했다.
김진·박자연·김해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