험악했던 분위기와 추운 날씨 속에서 피아노를 치던 20대 우크라이나 청년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취재차 키이우를 찾은 내게 그는 조국의 잠재력을 자랑하며 곧 어엿한 유럽 국가가 될 것이라고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10년이 넘은 지금, 우크라이나는 내전을 넘어 러시아와의 전쟁으로 국가 존망마저 걱정할 처지가 됐다. 얼마 전 백악관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에게 “당신에겐 카드가 없다”며 겁박하는 장면을 그 청년이 봤다면 나아지지 않은 조국의 신세를 한탄했을 것이다. 전 세계인들도 국제정치의 힘의 논리와 약소국 비애를 TV 화면을 통해 생생히 지켜봤다.
지난달 28일 백악관에서 회동한 트럼프 대통령(우)과 젤렌스키 대통령 [AFP = 연합뉴스] |
우크라이나가 겪는 수모와 위기는 과거 수차례 강대국들에 휘둘렸던 경험을 교훈으로 삼지 못한 탓이다. 자주국방 대신 외세에 의존해온 자업자득(自業自得)의 결과다.
우크라이나인들의 선조 격인 코사크 집단은 1654년 로마노프 왕조와 ‘페레야슬라프 협정’을 맺고 러시아의 지배를 택했다. 서부의 강자인 폴란드보다는 같은 슬라브 형제국인 러시아가 낫다는 판단이었지만 결과는 패착이었다. 일부 러시아 학계와 정치인들은 이 협정을 근거로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자발적으로 복종했다며 두 나라는 결코 동등한 지위가 아니라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협정 체결 후 러시아는 현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을 강압 통치하면서 코사크의 반감을 샀다. 이에 러시아 표트르 대제가 스웨덴과 북방전쟁(1700~1721)을 벌이자 코사크는 스웨덴이 이기면 독립시켜준다는 약속을 믿고 협력했다. 하지만 러시아의 승리로 끝나자 코사크는 변절자로 낙인찍혀 1차 세계대전 때까지 모진 억압 속에 건국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한편 우크라이나 서쪽에서는 폴란드에 이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통치했다. 폴란드는 3회(1772·1793·1795년)에 걸쳐 러시아·프로이센·오스트리아 3국 간 분할로 123년동안 사라졌다가 1차 대전 종전으로 재등장했다. 코사크는 러시아 제국이 1차 대전과 혁명으로 혼란한 틈을 타서 최초 민족국가인 ‘우크라이나인민공화국(UNR)’을 세웠다. 하지만 군사력이 보잘것없던 UNR은 때마침 나라를 재건한 폴란드와 동맹을 맺었다. 우크라이나는 폴란드와 철천지원수였지만 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에 맞서려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믿었던 폴란드가 볼셰비키와 1921년 ‘리가 조약’을 체결하자 힘 없는 우크라이나는 이듬해 소련에 흡수됐다.
2차 대전 때는 다수의 서부 우크라이나인들이 독일 편에 섰다. 독소(獨蘇) 전쟁에서 나치가 승리하면 소련으로부터 독립을 지원해줄 것으로 기대했다. 이들은 소련군에 편제된 동부인들과 총부리를 겨누며 동족상잔의 비극도 겪었다. 하지만 독일은 전쟁에서 패했고, 종전 후 소련 위세는 미국과 자웅을 겨룰 정도로 커졌다. 스탈린은 소련군으로 싸운 우크라이나인의 공로는 무시한 채 일부가 독일군이 돼서 소련에 맞섰던 일만 문제삼았다. 이후 1991년 소련 해체 때까지 우크라이나가 겪은 대가는 혹독했다.
우크라이나 역사는 스스로 힘이 없어 외세에 의존하려다 성과를 내지 못한 비운의 반복으로 요약된다. 3년 전 시작된 전쟁도 서방 지원에 기댔다가 낭패에 빠진 점에서 과거의 데자뷰다. 우크라이나는 소련에서 독립한지 30년이 넘었지만 자주국방은 요원하고, 이를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을 통해 해결하려고 한다. 오래된 외세 의존 행태 그대로다. 그러나 국제정치 역학 구도를 감안하면 서방이 우크라이나를 당장 나토 회원국으로 받아주긴 힘들다. ‘접경한 국가들과 충돌 금지’라는 나토의 기본 가입 요건부터 안 맞는다.
지난달 스웨덴의 비영리 싱크탱크인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는 보고서에서 “우크라이나는 외부 군사 지원에 크게 의존하고 있어 상대 측 변덕에 취약하다”고 지적했다. 또 “우크라이나 국방산업은 비밀주의와 부패가 만연해 서방의 투자 유치와 첨단 무기 개발이 어렵다”고도 했다.
젤렌스키는 나토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1990년대 중국 덩샤오핑처럼 ‘도광양회(韜光養晦)’ 자세가 필요하다. ‘드러내지 않고 때를 기다리며 실력을 기른다’는 것인데, 러시아를 자극하지 말고 국방과 산업 등 국가경쟁력부터 높이는 게 먼저다.
17세기 병자호란을 겪은 조선 효종이 청나라에 복수하기 위해 조용히 국방력을 다지며 북벌(北伐)을 준비했던 얘기를 젤렌스키와 이후 나올 우크라이나 지도자에게 들려주고 싶다. 물론 북벌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 준비 과정에서 일취월장한 조선의 전투력은 청나라 요청으로 파병된 두 번의 ‘나선(羅禪) 정벌’로 입증됐다. 임진왜란·병자호란에서 부실했던 조선군이 조총 부대를 보내 러시아를 상대로 큰 전과를 올렸던 일에 자강(自强)이 절실한 지금의 우크라이나도 관심을 가질 만하다.
김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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