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큰 장난감 기업, 레고. 하지만 주식은 안 팔아요. 레고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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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도적 1위 기업
레고의 지난해 매출액(743억 크로네)과 영업이익(187억 크로네)을 전년도와 비교한 그래프. 레고 연간 보고서 |
그래서 레고그룹 주가가 치솟았을까요? 그렇진 않습니다. 레고는 비상장기업이거든요. 1932년 설립 이래 증시에 상장된 적이 한 번도 없죠. 창업자인 올레 키르크 크리스티안센(1891~1958년) 자손들이 레고 경영권을 사실상 100% 지배합니다(75%는 창업주 일가가 직접, 25%는 레고재단이 소유).
비상장이라는 건 초기부터 돈을 잘 벌어서 굳이 외부 투자금을 끌어올 필요가 없었단 뜻이죠. 작은 나무 장난감 회사로 출발한 레고는 1949년 플라스틱 블록을 처음 내놨는데요. 이후 1958년 모든 블록이 서로 호환되도록 규격을 통일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면서 대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참고로 같은 색깔의 2X4 레고 블록 6개를 결합할 수 있는 방법은 무려 9억1510만개에 달한다는데요. 창의성과 품질이란 핵심 가치가 지금의 레고를 있게 하죠.
하지만 아무리 장인정신으로 무장한 기업이라도 시대가 변하면 위기가 닥치기 마련이죠. 레고의 첫 번째 위기는 1990년대 시작됐습니다. 디지털 시대가 열리면서 전에 없던 새로운 경쟁자, 비디오게임이 등장했기 때문인데요. 1998년 레고는 설립 이후 처음으로 연간 적자를 기록합니다.
컨설턴트들이 레고의 덴마크 빌룬드 본사로 달려왔습니다. 그들이 제시한 답은 다각화. 바비·피셔프라이스·핫휠 등 다양한 포트폴리오를 가진 미국 경쟁사 마텔을 따라하라는 조언이었습니다. 나온 지 50년 된 플라스틱 블록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란 거죠.
덴마크 빌룬드에 있는 레고 체험센터인 레고하우스를 위에서 내려다본 모습. 레고 홈페이지 |
조언대로 레고는 자체 비디오게임 회사를 만들고, 테마파크를 열고, 여자아이들을 위한 액세서리와 의류를 만들었습니다. 또 복잡한 조립이 필요 없는 미니피규어 잭 스톤, 액션 피규어 갈리도르 같은 신제품 출시와 마케팅에 공을 들였죠.
2004년 창업자 손자(3대 회장) 크옐 키르크 크리스티안센은 CEO직을 내려놓았습니다. 그가 후임으로 지명한 새 CEO는 맥킨지 출신의 36살 젊은 임원 예르겐 비그 크누스토르프. 임원회의에서 “우리는 불타는 플랫폼에 있습니다. 현금이 바닥나고 있습니다”라고 쓴소리하던 그를 눈여겨본 오너가 발탁한 거죠.
레고가 2002년 야심차게 출시했던 신제품 액션피규어 갈리도르. 하지만 처참한 판매 실적으로 인해 채 1년도 안 돼 생산을 중단했다. 레고 역사상 최악의 실패 사례로 꼽힌다. toypro.com |
빼기의 힘
“어떤 면에선 그가 스티브 잡스보다 더 나은 혁신모델입니다.” 2014년 레고의 경영혁신에 대한 책(‘브릭 바이 브릭’)을 낸 데이비드 로버트슨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경영대 교수는 크누스토르프 CEO를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도대체 크누스토르프가 무슨 대단한 일을 했기에 그럴까요. 그가 레고를 구하기 위해 한 건 더하기가 아니었습니다. 과감한 빼기였죠.
그가 CEO에 올랐던 당시, 레고는 새로운 일을 동시다발적으로 벌여놨지만 관리가 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신상품 피규어는 사출 금형 값이 너무 비싸서 수익성이 전혀 없었고요. 레고 부품 수가 1만3000개로 급격히 불어나면서 공급망은 엉망진창이 됐습니다. 테마파크 운영은 막대한 현금을 잡아먹고 있었죠.
크누스토르프는 마구 뻗어있던 가지들을 대거 쳐냅니다. 우선 생산하는 다양한 조각 수를 1만3000개에서 6500개로 확 줄입니다. 부품을 단순화하자 공급망은 가벼워졌죠. 전문성이 없었던 테마파크 레고랜드 사업은 사모펀드에 매각했고요. 수익성 없던 내부 컴퓨터 게임 부서도 없앱니다.
여자아이들을 위한 ‘레고 프렌즈’ 라인은 4년의 연구를 걸쳐 2014년에 처음 출시됐다. 높은 디테일을 원하는 여자아이들 취향에 맞춘 게 특징인데, 예를 들어 남자아이용 세트엔 없지만 레고프렌즈엔 있는 게 있다. 바로 화장실이다. 레고 제공 |
대신 레고의 본질인 ‘블록 놀이’에 집중했습니다. ‘소비자와의 캠핑’이라는 고객 연구 프로그램을 도입해 아이들이 어떻게 노는지를 관찰했죠. 이를 통해 6살 남자아이들이 닌자에 열광한다는 걸 파악해 ‘닌자고’ 라인을 만들었고요. 사실성을 중시하는 여자아이들 특성에 맞춰 개발한 ‘레고 프렌즈’ 라인을 출시합니다. 다시 히트작이 터지기 시작했죠.
레고를 열광적으로 수집하는 성인팬에 집중한 것도 이때부터입니다. 고객이 직접 신상품 아이디어를 내고, 팬투표를 통해 제품화를 결정하는 ‘레고 아이디어(Lego Ideas)’ 사이트를 운영한 건데요. 팬을 공동창작에까지 끌어들인 드문 사례입니다.
두번째 위기와 리셋
과도한 다각화 함정에서 벗어나 다시 단순화하고 본질에 집중하라. 이것이 레고의 극적인 턴어라운드가 주는 교훈입니다. 2005년부터 레고의 매출과 이익은 다시 성장세를 탔고요. 2010년대에 접어들자 전 세계가 레고의 부활에 찬사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온라인과의 경쟁이 그렇게 호락호락할 리가 없죠. 2010년대 중반이 되자 스마트폰이 빠르게 확산됐고요. 모바일 게임과 유튜브, 넷플릭스가 아이들의 주의력을 빼앗아 갑니다. 2017년 레고 매출은 8%, 영업이익은 17%나 감소합니다. 1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죠. “미국과 유럽 시장이 이제 포화상태에 도달했다”는 분석이 내부에서 나왔습니다. 창고엔 재고가 쌓여만 갔고요.
레고의 지난 20여년의 매출 추이. 파산 직전이었던 2003년의 첫 번째 위기, 성장이 가로막혔던 2017년의 두 번째 위기를 확인할 수 있다. 그래픽은 비주얼캐피탈리스트. |
레고가 당장 망할 것 같진 않았지만 성장은 가로막혔고, 내리막이 다가오는 게 보였습니다. 회사가 뭘 대단히 잘못해서라기보단, 세상이 워낙 빠르게 변한 탓이었죠. 다시 위기가 찾아왔고, 이번엔 레고 창업주의 증손자(4대 회장) 토마스 키르크 크리스티안센 회장이 재설정 버튼을 눌렀습니다. 반전을 위해 새로 투입된 CEO는 닐슨 크리스티안센. 맥킨지 출신으로 덴마크 산업기업 댄포스의 디지털화를 성공적으로 이끈 스타 CEO였죠. 2017년 10월 레고 CEO에 오른 그가 취임 첫날 해야 한 일은 직원 1400명 해고였습니다.
변화가 절실했습니다. 크리스티안센 CEO 역시 시작은 ‘빼기’였습니다. 그는 취임 뒤 첫 타운홀미팅에서 이렇게 말했죠. “우린 너무 많은 회의를 합니다. 그 모든 회의에 참석한 사람이 너무 많아서, 꼭 참석할 필요성이 오히려 없습니다.” 창의성을 방해하고 조직을 느리게 만들던 많은 내부 회의들이 사라집니다. 회의 참석자 수도 최소한으로 줄였고요.
동시에 KPI(핵심성과지표) 가짓수도 대폭 줄입니다. 리더십 모델별 제각각이었던 레고의 KPI 지표 수를 모두 합치면 수천개나 됐는데요. 그중 대부분을 없애고 공통적인 몇 가지만 남겼습니다. “그래서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몇 가지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는 게 그의 설명이죠.
그는 왜 일하는 방식부터 손봤을까요. 일의 속도를 높이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것저것 분석하느라 허송세월하는 대기업 문화가 문제라고 봤습니다. “모든 걸 100% 미리 생각하려는 것보다는 일단 시작한 뒤 방향을 바꾸는 게 낫다”는 게 그의 철학인데요. 그는 이를 기차에 비유해 설명합니다.
“새로운 전략을 도입할 때 직원의 80%가 그게 실제 구현된다고 믿는다면, 그 일은 실현될 겁니다. 그래서 움직이는 기차를 실제로 보여주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들이 기차에 올라타서 더 빨리 올라타게 만들 수 있으니까요. 그게 제가 일을 처리하는 근본적인 방식입니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문을 연 동남아시아 최대 레고 매장의 모습. 레고 제공 |
레고의 의사결정은 한층 빨라졌고, 그 결과 과감한 베팅이 시작됩니다. 온라인 시대에 맞지 않다는 일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오프라인 매장을 대대적으로 확장했죠. 레고 자체 매장은 이제 고객이 직접 만지고 체험할 수 있는 매력적인 쇼핑공간이 됐습니다. 생산능력도 빠르게 확장 중입니다. 멕시코·헝가리 등 기존 공장 생산량을 늘리는 것과 동시에 베트남과 미국에도 새 공장을 짓고 있죠. 판매하는 레고 제품 수는 점점 늘어 지난해엔 사상 최대인 840개가 됐는데요. 이 중 절반 가까운 46%가 지난해 새로 출시한 제품입니다.
특히 신제품 중에서도 성인용 고급 제품이 매출 성장의 주역입니다. 2020년엔 18세 이상을 위한 아키텍처 세트, 2021년엔 꽃 테마 세트가 출시됐는데요. 열혈 키덜트 고객들이 수십만 원짜리 고급 세트 수집에 나서면서 객단가를 높였고요. 레고 꽃을 조립하는 동영상이 틱톡에서 인기를 끌면서 여성 성인 고객까지 끌어들이는 데 성공합니다.
디지털로의 확장도 속도를 냅니다. 2023년 말 레고는 에픽게임즈와 협업해 ‘레고 포트나이트’ 게임을 내놨는데요. 이게 큰 인기를 끌어 지금까지 전 세계 8700만명이 이 가상 레고 블록을 조립하며 놀았습니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레고는 자체 비디오 게임 개발에도 다시 뛰어들었죠.
성인용 고급 제품은 레고의 성장을 이끌고 있다. 사진은 레고의 신제품인 1m짜리 티라노사우루스 렉스 세트. 레고 제공 |
본질에 집중하라
결국 지난 몇 년간 레고의 혁신은 빠르고 과감한 확장의 결과물입니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나요. 과거 2003년엔 지나친 확장이 경영악화의 원인으로 지목됐는데요. 이젠 오히려 확장이 성장 비결이라니. 모순되는 것 아닐까요?
하지만 크리스티안센 CEO가 밝힌 경영 원칙에 대입하면 바로 이해가 됩니다. “회사가 어떻게 가치를 창출하는지 그 본질을 알아보세요. 기업의 가치 창출에 도움이 되는 복잡성은 키우고 효과적으로 관리해야 합니다. 대신 이를 지연시키는 복잡성은 최소화하세요.”
닐슨 크리스티안센 CEO는 2017년부터 레고를 이끌고 있다. 레고 제공 |
레고라는 기업의 본질은 ‘블록 놀이가 주는 즐거움’에 있죠. 하지만 과거 확장 시기엔 블록과 상관없는 다른 것(피규어, 의류 등)을 기웃거리느라 본질과 점점 멀어졌습니다. 그 결과 막대한 투자에도 경쟁력을 잃고 추락했죠. 지금은 그 반대입니다. 블록 놀이의 즐거움을 더 많은 매장과 고객으로, 가상 세계로 확장하고 있으니까요. 본질을 계속 붙잡고 있는 겁니다.
장난감 시장의 역성장 추세를 거스르는 레고의 성장세는 계속될 수 있을까요.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점점 닫혀가는 소비자 지갑(레고는 상당히 비싸니까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 부과 으름장(레고의 미국 공장은 2027년에나 문을 엽니다) 등. 2025년엔 여러 난관이 도사리고 있는데요. 하지만 크리스티안센 CEO는 “이런 변동은 처음 있는 게 아니고, 우리는 과잉 반응하지 않도록 관리해 왔다”고 말합니다. 93년 된 세계시장 점유율 1위 기업 CEO다운 반응인데요. 오래된 브랜드의 혁신이란 어떠해야 할지, 레고가 그 길을 계속 보여주길 기대합니다. By.딥다이브
레고의 놀라운 점 중 하나는 수많은 모방자들이 생겨났는데도 그 경쟁력을 전혀 잃지 않았단 점이죠. 압도적으로 강력한 브랜드와 종교적인 고객의 충성도. 그저 부럽기만 합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해드리자면.
-레고가 발표한 2024년 연간 실적이 대단합니다. 전 세계 장난감 시장이 역성장한 지난해에도 매출은 13%, 영업이익은 10%나 증가했습니다. 단가 높은 성인용 제품의 판매가 늘면서 미국, 유럽, 중동 시장이 강력한 성장세를 보였습니다.
-레고는 2003년엔 거의 망할 뻔했습니다. 다각화를 시도하면서 집중력을 상실했기 때문이죠. 2004년 구원투수로 등판한 크누스토르프 CEO는 곁가지를 처내고, 다시 블럭 놀이에 집중하게 만들어 위기 극복에 성공합니다.
-하지만 시대는 빠르게 변했고 2017년엔 또다시 성장이 가로막히며 다시 위기가 찾아옵니다. 크리스티안센 현 CEO는 의사결정을 단순화하고 일의 속도를 끌어올리는 전략을 썼죠. 레고는 다시 과감한 투자로 성큼성큼 나아가게 됩니다. 본질에 집중하면 어디로 갈지가 보이는 법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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