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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의 北 포로 보고 알았다, 반드시 통일을 해야 하는 이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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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장부승의 海外事情]
자유민주주의 전파가
자유민주주의 방어다
조선일보

우크라이나 군에게 포로로 잡힌 북한 군인 리모(26)씨가 지난달 키이우 포로수용소에서 정철환 조선일보 특파원과 인터뷰하고 있다. /정철환 특파원


우크라이나에서 포로가 된 북한 군인들 인터뷰를 보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이제 20대에 불과한 젊은이들. 그 청년 입에서 “부모님이 못 견디게 보고 싶다”는 말이 나왔을 때 울컥했다. 해외 파병 길을 떠나면서 부모한테 연락 한번 못 하고, 10년 가까운 군 생활 동안 가족들 얼굴 한번을 못 봤다니. 이게 사람이 할 짓인가?

그 청년 입에서 “우리 인민 군단에서 포로는 변절이나 같습니다”라는 말이 나왔을 때는 분노했다. 항복을 죄악시하고 국민에게 자살을 강요한 구 일본 제국의 미친 군부 지도자들과 뭐가 다른가? 그런 슬픔과 분노 속에서 내 마음은 약 30년 전 내가 겪은 당황스러운 장면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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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군 드론의 표적에 잡힌 북한군. 러시아군 지원용으로 파병된 이들은 "드론은 한국군이 조종하는 것이다"라는 거짓 정보를 주입받고 전장에 투입됐다. 전쟁터에 투입되기 직전까지 단순 군사 '훈련'인 줄 알았다고 증언했다. /우크라이나군 제공


때는 김대중 정부 초기, 전역한 지 얼마 안 됐을 때다. 집에 갔더니 모친이 상기된 표정이었다. “편지가 왔다. 너희 둘째 이모한테서.”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둘째 이모는 이미 돌아가신 지 오래였는데, 죽은 사람이 어떻게 편지를 보낸단 말인가?

편지는 적십자사를 통해 북에서 온 것이었다. 내가 모르던 둘째 이모가 있었던 것이다. 형제들 중 가장 똑똑했다는 그녀는 학교에 무척 가고 싶었다. 1940년대 가난한 팔남매 가정의 둘째 딸이 학교를 갈 방법은 가출뿐이었다. 그렇게 가출한 그녀는 서울에서 공장을 다녔고, 전쟁이 터지고는 연락이 끊겼다. 그랬던 그녀에게서 편지가 온 것이다.

이산가족 상봉소에서 만난 이모는 고생한 티는 역력했지만 표정은 밝았다고 한다. 선물을 주면서 “이거 혹시 뺏기는 거 아니냐”고 물어보니 “장군님 품 안에서 잘 살고 있다”고 했다고 한다. 당시는 ‘고난의 행군’ 여파로 북한에서 아사자가 속출하던 시기이다. 이모는 정말로 ‘장군님’이 고마웠을까?

전쟁과 분단의 상흔은 외가 쪽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지리산 자락 마을에 살던 부친의 어린 시절, 빨치산은 공포 대상이었다. 툭 하면 내려와서 곡식을 뺏고 심지어 소까지 끌고 갔다. 그러던 어느 날 빨치산들은 짐꾼이 필요하다며 젊은이들을 데려갔고, 그중 한 명이 빨치산에게 대들다 불귀의 객이 되었다. 그 젊은이에게는 어린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가 나중에 우리 막내 고모와 결혼했다.

몇 년 전 고모부에게 한번 물어본 적이 있다. “아버지 생각 나십니까?” 잠시 흠칫한 고모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난 아버지 얼굴 기억이 안 난다.” “사진 같은 것도 없어요?” “사진이 딱 한 장 있는데 여러 사람이 찍혀서 얼굴이 작아 안 보여.” 잠시 침묵 후 난 다시 물었다. “그놈들이 밉다는 생각 해보신 적 없어요?” 고모부의 답변은 의외였다. “다 지난 일이다.” 그는 마치 자기 자신에게 되뇌듯이 다 지난 일이라고 반복했지만, 팔십을 바라보는 노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

엊그제는 일본 나고야 사는 당숙모한테서 영상 통화가 걸려 왔다. 큰손주가 명문대에 합격했단다. 축하의 덕담을 한 후 나는 오랜만에 옛날얘기 좀 들려달라고 했다. 숙모는 친정 식구가 없다. 1960년대에 북송됐다. 숙모는 1980년대 북한에 딱 한 번 가봤다고 한다. 일본에서 제법 엘리트였던 남동생은 함경남도 단천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다. 그 살림살이의 신산함에 가슴이 아파 돈 10만엔과 가져간 옷들을 챙겨주고 왔다고 했다.

“그때 왜 북한으로 간 거예요?” “동생이 공부를 잘했어. 미쓰비시에 합격했는데, 면접까지 끝나고 연락이 왔어. 조선인이라 안 된다고”. 차별을 피해 찾아간 ‘지상 낙원’은 알고 보니 ‘지옥’이었다. 이제 구순을 바라보는 숙모의 검버섯투성이 얼굴 위로 살짝 눈물이 그렁거렸다.

6·25전쟁에서 군인과 민간인 합쳐 사망한 사람만 200만이 넘는다. 한국 사람 누구라도 한두 다리 건너면 전쟁과 분단의 피해자가 있다. 이제 그 피해자들도 사라져 가고 있다. 살아 있다면 구십이 넘었을 둘째 이모에게서 연락이 끊긴 지 오래다. 남편을 먼저 보내고 70년간 홀로 살던 고모부의 모친도 얼마 전 90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당숙모의 부모 형제도 모두 세상을 떠났다. 이제 고통의 역사는 끝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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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에 있는 북한군 포로 백모씨와 리모씨


그게 아니라는 것을 나는 북한군 포로들 인터뷰를 보고 알았다. 전쟁과 분단의 상처를 자아낸 북한은 사과는커녕 오히려 자기들이 침략받았다고 적반하장이었다. 이제는 아예 자신들의 압제와 인권 말살을 독재 국가들 간 동맹을 통해 해외까지 확산시키려 하고 있다. 북한 문제를 지적하는 양심적 목소리에 대해서는 그 입 다물라며 핵과 미사일을 휘두른다. 우리가 그저 경제적 이익만 따지며 북한과 적당히 타협하고 문제의 본질을 외면한다면, 문제는 점점 더 악화될 것이다.

매일같이 옆집 아저씨가 가족들을 쥐어 패는데 방관만 한다면 우리 집의 ‘화목’이란 가치는 빛이 바랠 것이다. 독재에 침묵하는 ‘이기적’ 자유민주주의는 다른 나라의 존경을 받지 못하며 우리 국민의 지지도 구할 수 없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는 말이 있다. 북한에 전쟁을 걸자는 말이 아니다. 자유를 잃고 신음하는 북한 주민들에게 자유민주주의를 전파하려는 적극적 노력이야말로 우리 스스로 자유민주적 가치를 방어하는 최선의 수단이라는 얘기이다. 이것이 우리가 통일이라는 목표를 내려놓을 수 없는 이유이다. 이미 우리 헌법 제4조에서도 명백히 밝히고 있듯이 우리는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을 절대 포기해선 안 된다.

[장부승 일본 관서외국어대 국제관계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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