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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동물원] 순식간에 늑대밥...‘루피’들의 삶은 결코 잔망스럽지 않다

조선일보 정지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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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릭터 ‘루피’로 사랑받는 비버
늑대 기습에 희생되는 장면 생생하게 포착
천적 막으려 쌓은 댐이 오히려 천적을 접근시켜
사는게 지치고 힘들고 짜증 날 때 세상이 맘같지 않게 흘러갈 때 이 녀석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작게나마 위안이 됩니다. 캐릭터의 힘이죠. 어린이부터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까지 캐릭터가 뿜어내는 귀여움과 사랑스러움의 에너지에 흠뻑 빠져드는 이유입니다. 그렇게 저마다의 개성으로 자웅을 겨루는 동물 캐릭터의 등급별로 매겨조면 이 녀석이 원탑을 차지할 것이라는데 반론이 없을 것 같아요. 루피말입니다.

뽀롱뽀롱 뽀로로의 주인공 펭귄 뽀로로를 받쳐주는 여우조연급이었던 이 비버는 어쩌면 한국 캐릭터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스핀오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그 덕에 설치류 비버에 대한 관심도 더욱 따뜻해졌죠. 그런데 만화와 캐릭터 밖 실사판에서 루피 족속의 삶도 잔망스럽기 그지 없을까요? 그렇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짧지만 강렬한 동영상이 포착됐어요. 기껏해야 한 글자 차입니다. 만화나 애니메이션이 아닌 실사 다큐멘터리 속 루피의 삶은 ‘잔망’이 아닌 ‘잔혹’이라는 거죠. 글자 하나 바뀌는 순간 느낌은 쎄~해집니다. 우선 동영상부터 보실까요?

겨울 날씨가 혹독하기로 이름난 미국 중북부 미네소타주 보야저 국립공원의 늑대 생태를 탐구하는 시민단체 보야저 울프 프로젝트(Voyageurs Wolf Project)가 올린 동영상입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야간 투시 카메라에 늑대의 사냥장면이 생생하게 포착됐어요. 알다시피 늑대의 사냥법은 조직력과 지구력을 결합한 살육의 예술입니다. 우두머리의 일사불란한 지휘에 따라 여러마리가 조직적으로 역할을 맡아서 와피티사슴, 심지어 말코손바닥사슴 같은 덩치 큰 발굽동물을 끈질기게 쫓아갑니다. 곰같은 한 방도, 퓨마 같은 기습도 없지만, 찰거머리처럼 끈덕지게 쫓아붙는 놈들의 추격에 서서히 혼비백산 모드로 돌입한 먹잇감을 결국 거꾸러지며 피와 살을 늑대 무리에게 헌납하게 됩니다. 시튼 동물기의 늑대왕 로보 이야기 등을 통해서 익히 알려진 늑대의 사냥 서사예요.

그런데 이 장면은 지금껏 잘 몰랐던 늑대 사냥의 다른 면모를 보여줍니다. 어둠이 깔린 깊은 밤. 놈이 들어선 곳은 비버 댐입니다. 비버에게 ‘짐승계의 건축가’라는 명성을 안겨준, 촘촘하고 튼튼하기로 이름난 그 구조물 비버 댐 말입니다. 알려진대로 비버는 설치류를 포함해 그 어떤 짐승들보다도 입체적이면서도 복잡한 주거생활을 하고 있어요. 설치류의 전매특허인 평생 자라나는 이빨로 나뭇가지와 줄기를 베어낸 뒤 진흙과 돌을 적절하게 배합해서 물살이 흐르는 곳에 주거용 성채를 짓습니다. 그리고 물살이 거세져 휩쓸리는 일이 없도록 단단히 담벼락도 지어요.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비버 댐’입니다. 이 담벼락은 그러니까 비버 가족의 안위를 책임져주는 초강력 시건장치이자 자물쇠, 도어록이라고 할 수 있죠.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비버 왕국의 평화를 와르르르 무너뜨리는 재앙의 단초가 될 수도 있어요.

2017년 6월 호스슈 호수 산길(Horseshoe Lake Trail)에서 발견된 비버의 모습. 북미에서 가장 덩치가 큰 설치류다. /National Parks Service

2017년 6월 호스슈 호수 산길(Horseshoe Lake Trail)에서 발견된 비버의 모습. 북미에서 가장 덩치가 큰 설치류다. /National Parks Service


식탐에 휘둘리며 사냥욕으로 불타는 늑대에게 특히 그렇습니다. 협력사냥으로 덩치 큰 짐승을 쫓아가 지구력으로 거꾸러뜨리던 늑대가 이번에는 전혀 다른 사냥법을 카메라에 선보입니다. 끈질기게 뒤를 밟으며 기회를 보다가 단박에 덮치는 개별 플레이 전법이예요. 이 사냥법을 펼치기 좋은 곳이 바로 비버의 성채입니다. 이제 자정을 넘긴 암흑천지의 연못, 비버의 보금자리를 둘러싼 담벼락, 댐 위로 늑대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사뿐히 발걸음을 옮기며 물길이 일렁이는 물가로 내려갑니다. 고된 하루를 마무리하고 내일을 준비하고 있을 비버가족이 안식하고 있는 곳으로요. 그리고 눈깜짝할사이의 급습이 이뤄집니다. 댐 아래 물가에서 올라온 늑대의 입에 방금 포획한 어린 비버가 물려있어요.

비버가 평생 자라는 이빨을 이용해 나무를 쓰러뜨리기 위해 쏠고 있다./National Parks Service

비버가 평생 자라는 이빨을 이용해 나무를 쓰러뜨리기 위해 쏠고 있다./National Parks Service


넙적한 꼬리, 통통한 몸매, 앙증맞은 볼살의 얼굴까지...캐릭터의 원류가 된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그 볼살 사이의 안광이 빛납니다. 그 몸뚱이를 물고 있는 늑대의 안광과 함께요. 식욕에 불타는 포식자의 눈빛과 생을 마감하기 직전의 희생물의 눈빛이 기괴한 심야의 미장센을 만들어내네요. 이 비버의 몸뚱아리가 앞으로 얼마나 무지막지하게 해체 분리될지는 슬픈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저 넙대대한 특유의 꼬리마져도 늑대의 식감을 돋워주는 디저트가 될 것입니다. 같은 지역에서 촬영된 또 다른 영상도 한 번 보실까요?


이번 공격은 비버 댐을 활용하지 않은 일반적 매복공격이었습니다. 단 한번의 급습으로 물이 첨벙이고 또 어린 비버가 갈갈이 해체되 늑대의 위장 속으로 향하는 최후의 급행열차 티켓을 예약했네요. 얼핏 비정해보이지만, 이 과정을 통해서 비버들은 과잉 번식에 이르기 전에 적절히 개체수가 통제될 것입니다. 비버는 북아메리카에서 가장 덩치가 큰 설치류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설치류인 남미의 카비파라와 쌍벽을 이뤄요. 설치류라기에는 기겁할만한 거대한 풍채, 체계적이고 질서있는 무리 생활, 물을 떼어놓고는 살아갈 수 없는 습성까지… 비버와 카피바라는 도플갱어처럼 닮았습니다.

늑대가 비버의 사체를 물고 가족에게 가고 있다. 좀처럼 보기 드문 장면이다./Voyageurs Wolf Project

늑대가 비버의 사체를 물고 가족에게 가고 있다. 좀처럼 보기 드문 장면이다./Voyageurs Wolf Project


사람의 손에 이끌려 동물원으로 옮겨지지 않는 이상 같은 공간에서 마주칠 일도 없죠. 그래봤자 이들의 혈통은 설치류예요. 설치류가 어떤 존재입니까. 젖먹이 짐승 중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생장 속도와 번식 능력으로 가공할 숫자로 지구상에 번성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숫자를 불리는 대다수가 다른 짐승의 먹잇감으로 희생돼죠. 많이 낳는만큼 많이 먹히는 운명의 굴레를 타고난 족속입니다. 그건 유달리 덩치가 큰 카피바라나 비버라고 해도 예외가 아니거든요. 괴수들의 총집합소격인 아마존에서 카피바라는 각종 맹수들의 식사감으로 널리 사랑받습니다.

퓨마·재규어·악어(카이만)·아나콘다·부채머리수리 등 이들을 호시탐탐 노리는 포식자들이 한가득입니다. 비버도 같은 처지예요. 늑대·퓨마·코요테·스라소니·울버린·곰·여우까지도 비버고기라면 사족을 못씁니다. 이렇게 사방이 천적들이다보니 아예 거처를 강한가운데로 옮기고 수중 가옥이 떠내려가지 않도록 댐을 짓으면서 이들은 안전을 도모해왔죠. 하지만, 그 담벼락은 이번의 경우처럼 천적의 접근을 도와주는 지옥의 구름다리 역할을 하고 말았습니다. 결코 잔망스럽지 않고 잔혹스러운 삶을, 루피 족속들은 고단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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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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