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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일의 맥] 양궁처럼, 쇼트트랙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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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 밀어내고 새로운 전설의 탄생…양궁이 세계 최강인 이유
쇼트트랙·빙속 보면서 '건전한 경쟁'의 중요성 새삼 느껴
뉴스1

9일(현지시간)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 빙상훈련센터 다목적홀에서 열린 하얼빈 동계아시안게임 쇼트트랙 남자 1,000m 결승에서 장성우가 금메달을 확정지은 후 기뻐하고 있다. 2025.2.9/뉴스1 ⓒ News1 이승배 기자


(서울=뉴스1) 임성일 기자 = 지난 설 연휴 기간 한 방송국에서 '전설의 리그'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전 세계가 인정하는 한국 스포츠의 자랑 '양궁' 종목 전현직 스타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내용이었다. 2020 도쿄 올림픽 3관왕 안산과 지난해 파리 올림픽을 지배한 임시현 등 현역들도 반가웠지만 백미는 '은퇴한 레전드'들의 녹슬지 않은 실력이었다.

수월해보이나 일반인들은 활시위 당기는 것조차 버거운 종목이 양궁이다. 체력, 집중력, 기술 뭐 하나 부족하면 어이없는 곳으로 화살이 날아간다. 그런데 나이가 꽤 든 엄마 궁사들도 여전히 '엑스 텐'을 쏘고 있으니 감탄이 나왔다.

함께 지켜보던 부친이 "그런데 저런 선수들도 있었네" 무심코 내뱉었다. 은퇴 시점이 그리 오래되지 않은 장혜진이나 기보배야 익숙하지만, 아버지 말처럼 기억이 어렴풋해지거나 '그랬던가' 싶은 선수들도 있었다. 하지만 해당 선수 프로필도 금은보화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래서 대한민국 양궁이 강하구나'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국제 대회에서 금메달을 따는 것보다 국내 대표 선발전이 훨씬 어렵다는 양궁 선수들의 토로는 제법 알려진 이야기다. 은퇴한 선수도 어지간한 현역보다 잘 쏜다. 직전 올림픽 3관왕도 다음 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하는 것이 한국 양궁 레벨이고, 전설을 밀어내고 새로운 전설이 탄생하는 시간이 겹겹이 쌓여 '세계 최강' 한국 양궁이 뿌리 내렸다. 이게 비결이다.

새로운 피가 활기차게 돌지 않으면 몸은 무기력해진다. 뚜껑을 열지 않아도 속이 보이면 재미없는 판이다. 양궁대표팀처럼 안에서 치열해야 밖에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 그 맛을, 그 진리를 2025 하얼빈 아시안게임에서도 확인했다.

하계 종목 양궁만큼 전 세계가 '타도 대한민국'을 외치는 동계 종목 쇼트트랙은 이번에도 명성을 입증했다. 총 9개 세부 종목 중 6개 금메달을 가져오는 역대 최고성적(금 6, 은 3, 동 5)을 거뒀는데, 텃세와 반칙을 서슴지 않는 중국에서 거둔 성과라 더 빛났다.

남녀 모두 중국과의 대결이 초점이었다. 하지만 우리 선수들 입장에서 진짜 경쟁자는, 함께 땀 흘려 서로를 너무도 잘 아는 동료였는지 모른다.

대회를 앞두고 여자부는 새로운 에이스 김길리가 조명 받았다. 결과적으로 김길리는 커리어 첫 아시안게임에서 2관왕에 올라 기대에 부응했다. 하지만 보다 큰 성과를 낸 선수는 앞선 에이스이자 무려 1년 동안 휴식을 취한 최민정이었다. 후배의 급성장을 묵묵히 지켜보며 칼날을 갈았을 최민정은 3관왕으로 건재함을 알렸다. 김길리가 있었기에 최민정의 부활이 가능했다는 생각이고 최민정이 돌아왔기에 김길리의 다음 스텝이 더 궁금하다.

남자부도 비슷했다. 5관왕에 도전한다는 간판 박지원을 2관왕에 그치게(?)한 이는 후배 장성우였다. 개인전인데 마치 팀 경기처럼 중국이 비매너를 선보인 500m와 석연치 않은 판정으로 실격 처리된 계주는 아쉬움이 남겠지만 남자 1000m는 장성우의 레이스가 박지원보다 빛났다. 모두가 박지원을 주목할 때, 당당한 실력으로 추월하는 후배 장성우를 보며 양궁만큼 강한 대한민국 쇼트트랙의 힘이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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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현지시간)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 스피드 스케이트 오벌에서 열린 하얼빈 동계아시안게임 스피드 스케이팅 여자 팀스프린트에서 우승한 이나현, 김민선이 기념촬영하고 있다. 2025.2.9/뉴스1 ⓒ News1 이승배 기자


여자 스피드스케이팅에서도 그런 예가 나왔다. '포스트 이상화'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김민선보다 먼저 금메달을 획득한 선수는 다음 세대라 여겨진 2005년생 이나현이었다. 이나현은 이번 대회에서 처음 정식종목이 된 여자 100m에서 김민선보다 0.004초 앞선 기록으로 금메달을 획득했고 이어 여자 팀 스프린트 우승, 여자 500m 은메달과 여자 1000m 동메달 등 출전한 모든 종목에서 시상대에 올랐다.

김민선은 금메달 2개, 은메달 1개로 하얼빈 대회를 마무리했다. 결코 나쁘지 않은 성적이다. 하지만 그는 "모든 것이 다 아쉬었다"면서 "많이 배웠고, 정신적으로 한 단계 더 성숙해졌다"고 전했다. "내 앞길은 창창하다"는 당돌한 이나현과 "새롭게 다시 뛰겠다" 이 악문 김민선 덕분에 내년 밀라노 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이 벌써 기대된다.

남자 스피드스케이팅 중장거리 간판 이승훈이 37세의 나이로 팀 추월에서 은메달을 추가, 개인 통산 9번째 메달을 손에 넣은 것은 이번 대회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면이다. 이제 이승훈 앞에는 '동계 아시안게임 최다 메달리스트'라는 훈장이 붙는다. 존경의 박수가 아깝지 않다. 그에게 은퇴를 운운하는 것은 실례가 맞다. 하지만 지금까지 '고독한 레이스'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은 생각해볼 대목이다.

자극을 주는 누군가 없이 혼자 뛰면 그리 멀리 가지 못한다. 건강한 경쟁이 발전을 도모하는 법이다. 양궁처럼 또 쇼트트랙처럼. 어디 스포츠에만 통용되는 얘기겠는가. 세상 이치가 다 그렇다.

lastuncle@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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