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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 '청계천의 聖者' 노무라 목사

조선일보 오태진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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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마흔세 살 일본인 목사 노무라 모토유키(野村基之)가 청계천 하류 개미마을에 갔다. 지금 군자차량기지 부근 둑 아래 땅을 파고 얼기설기 지은 움막집들에 1600가구가 살았다. 청계천 따라 6만명이 살던 빈민촌에서도 가장 비참한 곳이었다. 거적문을 들치고 들어간 쪽방에 열댓 살 소녀가 누워 있었다. 옆구리와 무릎에 드러난 하얀 뼈에 파리떼가 새카맣게 달라붙어 있었다. 소녀의 어머니는 병원 갈 엄두도 못 낸 채 무당을 찾아다녔다.

▶노무라 목사가 소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소녀는 눈만 굴리며 쳐다볼 뿐이었다. 노무라는 "예수가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고 했다. 소녀는 두 달 뒤 숨졌고 노무라가 찍은 사진 속에 남아 있다. 그가 1970년대 청계천의 밑바닥 삶을 담은 사진 500여장으로 지난주 사진집 '노무라 리포트'를 냈다. 그는 1984년까지 한국을 쉰 차례 넘게 드나들며 빈민을 도왔다. 그는 "일제 침략이 없었다면 6·25도, 청계천 빈민도 없었다"고 믿는다.


▶노무라 목사는 도쿄 집을 팔아 청계천에 탁아소를 지었다. 남양만 간척지로 옮겨간 철거민이 키우게 하려고 뉴질랜드 종자 소 600마리를 사오기도 했다. 80년대까지 한국으로 부친 돈이 7500만엔, 8억원이 넘을 거라고 한다. 그는 야마나시현 산골에서 가정 교회를 꾸리고 있다. 기증받은 헌옷을 입고 사는 검소한 삶이다.

▶노무라 목사는 작년 2월 서울 일본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을 찾았다. 무릎 꿇고 일본군위안부 동원을 사죄했다. 함께 청계천 빈민 구제를 했던 제정구의 13주기(周忌) 추모식에 온 길이었다. 그는 플루트를 꺼내 가곡 '봉선화'를 연주했다. "일제 강점기 한국인의 애환을 담은 이 노래가 위안부 할머니들께도 위로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지난 8월에도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 정부에 사죄하라고 했다. "일본에 역사의식이 없다면 희망도 없다"고 했다.

▶그는 일본 우익들로부터 협박 전화와 이메일에 시달린다. 그러나 "목소리를 내지 않을 뿐, 지난 역사에서 가해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미안한 마음으로 사는 양심적 일본인이 더 많다"고 했다. 그가 어제 서울시 명예시민증을 받았다. 시청에서 '노무라 할아버지의 서울 사랑' 사진전도 열었다. 여든두 살 노무라 목사는 죽어 한국에 뼈 묻기를 소원한다. "한국은 내 인생의 기반이었고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소명(召命)의 땅입니다." '청계천 빈민의 성자(聖者)'에게 건네는 우리의 감사(感謝)가 너무 늦었다.

[오태진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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